20210403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 (누가복음 23장 44-56절)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오후 3시까지 약 6시간 매달려 계셨습니다. 44절에서 말하는 제 육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약 세시간이 지난 정오를 가리킵니다. 정오는 하루 중에 태양이 가장 밝게 빛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 날, 해는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어둠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오후 3시까지 이어졌습니다. 태양이 빛을 잃은 세상을 한 번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사방이 칠흑 같은 밤처럼 컴컴하니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성경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예수의 죽음이 평범한 어느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심을 나타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시간이 거의 되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지성소와 성전의 나머지 부분을 나누는 커튼 역할을 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서 휘장은 그 거룩한 공간을 분리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도 일년에 대속죄일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바로 그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순간에 찢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이제는 활짝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전에는 죄 지은 자들은 제사장들의 도움을 입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죄로 인해 오직 대제사장만이 하나님 임재하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오직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계신 곳에는 본래 죄인이 갈 수 없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죽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죄인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의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4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기도의 내용이 익숙하지 않습니다만,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이 대목이 아주 익숙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도는 시편 31편 5절에 있는 말씀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는 기도였습니다.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유대인들은 잠드는 것을 죽음의 문턱에 서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잠이 들기 전 자신들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즉 시편 31편 5절의 기도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란 신뢰를 표현하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가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주실 것을 간구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곁에서 지켜본 로마의 백부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들의 십자가형을 책임지는 로마 장교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고통스러워하고, 살기 위해 발악하는 등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반응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죽는 죄수를 본 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위탁하셨던 예수님을 보며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하고 감동하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이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자들과 여자들도 다 멀리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하염없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아일 것이란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큰 슬픔과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여론은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 지도자들이 두려워 그의 곁을 떠난 상태입니다. 이 때 공회 의원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이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공의회 회원들이 예수를 죽이자고 했을 때도 당당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가리켜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로마의 관례상 사형당한 사람의 시신은 친족에게 내어주기도 했습니다만, 반역죄나 내란 교사죄로 처형 당한 죄수의 경우는 시신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친족도 아닌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준 것으로 미루어보아, 빌라도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예수의 죽음이 유대인들의 억지스러운 주장에 의해 당한 억울한 죽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로 감쌌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한 번도 사람을 묻은 적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토요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입니다. 통상 금요일 오후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후 3시에 죽으셨으니,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고, 시신을 내려 무덤에 안치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안식일이 거의 시작되는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도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어느 무덤에 모셔 두었는지만 확인하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매장은 끝이 납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든 기대와 소망도 다 끝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곧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