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 (누가복음 23장 32-43절)


예루살렘 성 밖에는 그리스말로 ‘해골’이란 뜻을 가진 골고다 언덕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갈보리’라고도 불러지는 이 ‘해골의 언덕’은 당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던 죄수들의 사형이 집행되었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 또 다른 두 명의 죄수들은 십자가 처형을 받기 위해서 함께 로마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이 해골의 언덕까지 끌려왔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들을 ‘행악자’라고 기록하고 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두 사람을 ‘강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강도’란 말은 흔히 폭력을 동반하여 물건을 약할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강도의 구체적인 죄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십자가 처형이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죄를 저지르거나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다루는 사형이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분명 이 두 사람은 살인과 약탈과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악랄한 범법자들과 함께 십자가 처형장소로 끌려가는 예수님을 보며, 그 역시 범죄자 중 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그를 정죄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해골의 언덕에 도착한 예수님과 두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목 박히신 십자가를 가운데 세우고 그 좌우편에 두 죄수들이 못 박힌 십자가를 하나씩 세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십자가에 매달려 극심한 고통을 받으시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최근에 아시아 혐오 범죄가 미국 사회에서 큰 이슈입니다. 일상 속에서 길을 가다가 낯선 이들에게 표적이 되어 폭행을 당하는 것은 얼마나 불쾌한 일입니까? 만일 폭행을 당한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면, 내 어머니였다면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가만히 참기 힘들 것입니다. 기사를 보면 어떤 경우에는 모르는 사람이 침을 뱉기도 했답니다. 이런 일 당하면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용서가 아니라 당장 고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입힌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에게 매맞고, 침 뱉음 당하고, 채찍질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너무 아파서 고함을 치며 소리를 질렀을 것 같습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로마 병사가 너무 미워서 욕이라도 지르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실로 우리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구원해가고 계십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원수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인내하며 끝까지 섬기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친히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이제 형제들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그도 범죄자 중 하나로 사람들에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위해서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계셨고, 범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예수님 오시기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죄는 다 용서해주어도, 나의 죄는 용서하시기 싫어하시는 것 같다.’하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불신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사함의 확신을 방해하는 원수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 예수가 죽는 순간까지도 죄사함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토록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간절하게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죄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운명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누가 가질 것인지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네 명의 로마 군사들은 먼저 예수님의 겉옷, 신발, 허리 띠 등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각각 네 등분으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입고 계셨던 속옷의 경우 통으로 짜 있어 나눠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에 로마 군사들은 누가 예수님의 속옷을 가져갈 것인가 제비뽑기를 한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뽑아 가지는 모습은 우연이 아니라, 이 역시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메시아의 손과 발이 찔리고, 그의 겉옷을 나눠가지며 속옷을 제비뽑는 모습까지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하게 통치하시기에 주님의 말씀은 일 획 일 점도 남김없이 성취됩니다. 예수님 탄생 약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기록들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5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표현은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 관원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으니, 그가 만일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 메시아에 대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성취하시면서 죽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그를 조롱했습니다. 나머지 유대 백성들도 한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모든 병든 자들을 능히 고치고, 귀신들을 좇아내고,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함으로 소문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단지 하나의 구경거리로만 생각하며 그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갖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3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사들 또한 계속해서 고통 죽에 죽어가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신포도주’를 주며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하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께 마시라고 나눠준 신포도주는 ‘쓸개 즙을 탄 포도주’였습니다. 통상 포도주에 쓸개를 오래도록 담가두어 매우 쓴 맛을 내는 포도주였습니다. 이 쓸개는 마취 효과가 있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죄수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신포도주’를 가리켜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마취 효과를 가진 포도주란 뜻입니다. 마태는 구체적으로 이 포도주가 ‘쓸개 탄 포도주’라고 정확하게 기록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역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69편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오늘 본문에 사용된 ‘신포도주’가 바로 유대인들이 신포도주를 발효하여 만든 ‘식초’입니다. 따라서 로마 병사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쓸개 탄 신포도주’를 마시게 했을 때, 그들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시편 69편 21절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메시아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시고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들의 구원자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이 준 쓸개 탄 신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죽어가는 희생 제물로서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친히 다 감당하셨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계속해서 예수에게 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려했고, 예수님은 마시기를 원치 않으셔서 한 동안 실랑이가 계속되었습니다. 37절을 보면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하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이처럼 유대 관원들과 로마 병사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하여 그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조롱했던 것입니다.
38절을 보면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께 수치를 주고,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위해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This is the king of the Jews)라고 쓴 패를 달았습니다. 신약성경의 4개의 복음서 중에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죄패에는 정확하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세 나라 말로 모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세 나라 말로 예수의 죄목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죄패를 붙였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은 예수님의 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어 예수님을 함께 모독하고 비방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 유대의 지도자들, 로마 군인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범죄자까지도 똑같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비방할 아무런 자격도 없는 이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예수님을 향해 이처럼 조롱이 섞인 언사를 내뱉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주께서 받으신 수모가 얼마나 모욕스러운 것인지 더욱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한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하던 이를 꾸짖었습니다. “너는 저 사람과 똑같은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한편 오늘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못 박힌 두 사람의 강도들 모두 예수님을 욕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복음과 다른 나머지 복음서들의 기록상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처음에는 이 강도도 나머지 죄수처럼 예수님을 욕했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까지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점차 시간이 지나가며 예수는 자신들과 다른 존재임을 직감하고, 회심의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해석합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는 십자가 죽음 가운데도 영혼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또 하나의 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를 돌이켰던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처럼 처음에는 예수를 함께 비방하던 이 강도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과 같이 이제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의 자세와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4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그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여기서 강도가 사용한 ‘당신의 나라’ (Your kingdom)는 이 표현은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그가 믿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강도가 평생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오늘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보내는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가 그의 곁에 없었더라면,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저주받은 범죄자로 그의 인생을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 즈음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있음을 고백하며 그의 나라에 자신도 들어갈 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여태까지 아무런 선행도, 봉사활동도, 자선활동도, 교회에 헌금도 충분하지 못했는데 다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해서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이와 같이 마지막 순간까지 어떠한 삶의 의로움의 작은 조각조차 발견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에 여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함께 살펴봅시다. 43절 말씀입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어느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어느 곳에서나 예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주님께 돌아가기에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주를 의지한 강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낙원’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입니다. 우리가 영어로 ‘파라다이스’라고 부르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창세기에서 ‘에덴 동산’을 말할 때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즉 이전에 원죄를 짓기 전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교제하며 날마다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며 완전한 안식을 취하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자가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인으로 믿으며 그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의 구원을 요청하며 부르짖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구주 예수는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처절한 모욕 속에서도 죽는 순간까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질문보다 우리 인생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무관심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무관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조롱하고 로마 병사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처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그의 삶과 사역을 비방하고 부인하며 짓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회개한 강도와 같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참 구원자이심을 발견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분이십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가 여러분의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십시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우리기 가진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들도 회개한 강도와 같이 주님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고 주와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위대한 사랑을 날마다 가슴에 품고, 구원하신 주를 찬양하며 주를 따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