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1 사형을 언도받으신 예수님 (누가복음 23장 13-25절)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 시도 죄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은 사형에 처할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불러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오도한다고 하여 내게로 끌고 왔으나, 보다시피, 내가 그대들 앞에서 친히 신문하여 보았지만, 그대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였소.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를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이오.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 빌라도는 헤롯 역시 이 사람에 대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없음’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아주 오래되고 권위있는 초기 성경 사본들에는 빠져 있으나, 다른 사본들에는 들어가 있다는 것을 표시해주는 것입니다. 초기 사본에는 없으나, 후에 필사자가 다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근거해서 추가한 내용으로 보기 때문에 ‘없음’이라고 비워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가 하면, “명절이 되어 빌라도가 죄수 한 사람을 그들에게 놓아주어야 했다”라는 내용이 들어갑니다. 우리나라에는 광복절 특사라는 것이 있지요? 광복절을 맞이하여 대통령이 죄수로 복역하는 사람들 가운데 특별 사면을 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대통령이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를 맞아 죄수를 석방하는 사면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경우 사면은 전적으로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유대 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사형은 불가하니 체벌을 하고 석방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잘못을 저질러 체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유월절을 맞아 특별 사면을 통해 예수님을 사면하려고 하자, 유대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18절 본문을 보면 이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이 자를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의했습니다. 18절에 “이 사람을 없이하라!”는 표현은 그를 ‘제거해버리라’, ‘지워버리라’고 말하는 강한 어조로 백성들이 가진 예수님을 향한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로마 총독이 사면권을 통해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19절을 보면 바라바는 성 안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죄로 인해 옥에 갇혀 있던 죄수였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투옥된 유대인 민족주의 혁명가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독립군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라바가 이루지 못한 군사적/정치적 독립을 예수님께서 이루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바라는 메시아가 바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해 줄 군사적인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기대는 얼마 못 가고 커다란 실망과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대중은 독립투사 바라바가 돌아오기를 바랬고,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죽여달라는 성난 유대인 무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게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22절에 빌라도가 세 번째로 또 한 번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말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봐도 그를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쳐형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이 절실했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나게 되면, 로마 황제에게 직접 보고됩니다. 그렇게 되면 총독인 빌라도가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그의 정치 인생도 끝이 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는 무리들 뒤에는 이들을 선동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빌라도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나사렛 예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군중의 폭동까지 무릎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폭동과 민란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그들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빌라도는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갇힌 바라바는 유월절 특별 사면으로 놓아주고, 예수는 유대인들의 뜻대로 십자가 사형에 처하기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본디오 빌라도 모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위해 무고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 사형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만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죽인 살인자나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죄를 지은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로 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극도로 혐오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1장 22-23절 말씀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나무로 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그가 주장한 대로 메시아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임을 무리들에게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것을 보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그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생각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주장하신 대로 참 메시아시라면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를 당하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은 우리들의 저주와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형수는 먼저 온 몸에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가로질러 처형 장소까지 직접 십자가에 쓰일 가로 기둥을 메고 가야 했습니다. 십자가 처형당하는 죄수는 온 몸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줄로 꽁꽁 묶이거나 못에 박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피를 흘리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야 했습니다. 십자자형은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에 거주하는 대중에게 두려움을 심기 위한 목적으로 죄수들의 죽음을 전시했습니다. 로마에 대항하는 범죄자가 당할 무시무시한 십자가 형벌을 피지배민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공포로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서 당하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디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가 사형에 당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심지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내렸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비참하고 잔인한 죽임을 당할 줄 알고도 무죄하신 예수님을 거짓으로 모함하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들 입니까? 무죄한 의인 한 사람을 이토록 무시무시한 십자가 형벌에 처하게 한 빌라도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가슴 아픈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토록 끔찍하고 억울한 십자가 처형을 겪으신 것은 바로 우리들을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우리 구주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거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보여주십시오. 그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