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8 베드로전서 강해 (12)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4장 8-9절)

들어가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율법은 많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서 다 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율법을 아주 간단하게 네 단어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제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기도’와 ‘사랑’입니다. 여기서 ‘기도’는 하나님 사랑을 의미하고, ‘사랑’은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서로 힘써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도가 서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피상적인 사랑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그와 같이 피상적인 사랑을 하는 성도는 교회 안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 속에 한 사람을 정하여 최선을 다해서 그 한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우리 구주 예수님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만, 또한 주님은 한 사람씩 마음에 품고 움직이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삭개오, 니고데모,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중풍병자와 같이 1대1일로 만나 사역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열 두 명이라는 소수의 인원을 정하여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시간의 70%를 쏟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핵심 멤버로서 주님은 그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코너스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내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그 한 사람을 정하셨습니까?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많은 아이들을 동시에 사랑하려고 하지 마시고 한 아이를 정하셔서 그 아이에게 전부를 쏟아주십시오. 교회의 리더 여러분도 모든 성도들을 동시에 피상적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시고, 한 사람에게 집중하여 그에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나눠주십시오.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모두를 동시에 사랑하려 하는 피상적인 사랑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실상 교회 전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내 전부를 쏟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되어도 여러분은 이미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어린 시절 세상을 바꾸겠다고 부푼 꿈을 꾸며 집을 나선 아이는, 결국 자기 자신조차 바꾸지 못하고 쇼파에 앉아 한 손에 리모콘을 들고 TV 채널만 바꾸는 어른이 되었다’는 이 시대의 자조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책을 읽고 지식을 많이 쌓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바꿔서요? 아닙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길은 오직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함으로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자들 되길 축복합니다.

1. 서로 열심으로 사랑하라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하는 많은 일들 중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기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도들을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 말하는 ‘서로’는 바로 한 구주를 믿고 살아가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신 줄 믿으시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코너스톤 교회에 함께 모여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으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교회에서 만나게 하셨을까요? 이 미국 땅에, 이 일리노이 주에 수많은 한인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한인들이 있는데 왜 우리들을 서로 코너스톤 교회에서 만나게 해 주셨을까요? 서로 사랑하라고 붙여 주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권면 드립니다. 아직도 내가 사랑해야 할 그 한 사람을 정하지 못하셨다면, 오늘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많은 분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요한복음이 성경의 전체 내용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내용이 바로 쌍둥이 구절이라 불리는 요한일서 3장 16절에 있습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형제들에게 그대로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와 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한 번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한 사람을 진실되이 사랑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의 단점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단점이 치명적인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 사람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올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 한 마디가 나를 찌르기도 하고, 상대방의 행동 하나가 너무나도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진정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치명적인 단점에서 불구하고 끝까지 용서하고 용납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에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치명적인 단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둘이 없으면 죽고 못산다 해서 결혼하는 커플들이 왜 저렇게 많이 이혼할까요? 연애인들 이혼하는 기사를 보면, 이혼 사유에 ‘성격차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결혼해서 살아가고 있는 다른 부부들의 경우에는 두 사람의 마음이 100% 맞아 살아갈까요? 세상에 나하고 마음이 100% 맞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100% 내 마음에 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 부족함을 감싸주며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아홉 달 반 동안 뱃속에서 키워 낳은 자식을 부모가 볼 때도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볼 때, 어머니가 딸을 볼 때,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더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부모로서 자녀가 이 부분만 고치면 이 자녀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 것 같은데, 부모가 자녀를 고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합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의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싸주고 품어주는 것을 가리켜 ‘용납’이라고 부릅니다.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그 단점까지도 품어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다시 정의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함께 따라 읽어 봅시다. ‘사랑은 상대방의 많은 죄를 덮어주고 간과해서 용서하는 것이다’ 아내분들 남편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남편의 부족함도 품어주십시오. 남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아내의 연약한 부분까지도 품어주십시오. 우리 부모님들 자녀들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십시오. 오히려 연약한 자녀일수록 더 열심히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품은 그 한 사람에게도 이와 같이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치명적인 단점이 가시가 되어 우리를 찌를 때,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아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었고, 여전히 견딜 수 없이 더러운 ‘죄’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허물을 덮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 주고 아프게 하는 가시 같은 상대방의 치명적인 단점까지도 덮어주고 용납해줄 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며,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을 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어서 마태복음 5장 43, 44, 46, 47절을 읽겠습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상대방의 많은 죄를 덮어주고 간과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 내가 다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가 용납해주어야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상대방의 다름을 품어주는 것이 용납입니다.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고, 단점까지도 용납해주는 죄를 덮어주는 사랑이 우리 코너스톤 교회 가운데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2.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라
베드로전서 4장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베드로전서가 집필되던 시절에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핍박을 피해 다니던 성도들을 교회가 대접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나그네와 같이 떠도는 형제 자매들의 경우 잠자리가 없기에 각 성도들이 자신의 집과 방을 내어주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형제들을 돌아보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그 일이 과중 되어 교회 안에서 원망과 불평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원망의 목소리는 이런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해?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왜 나만 섬겨야 해?” 불평의 목소리는 이와 같습니다. “왜 나는 아무도 안 돌보아줘?” 교회 일이니까 할 수 없이 섬기기는 하는데 마음에 자꾸만 교회를 향한 원망이 생기고, 다른 성도들을 향한 불평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마음 상태를 주의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함께 주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을 대접하고 섬기는 일을 귀찮은 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여기고 사랑과 기쁨으로 성도를 대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형제 자매 중에 도움이 필요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섬길 때, 자신이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를 섬길 때는 억지로 하지 말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고, 원망이나 불평하는 마음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희생이 따릅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희생이 따릅니다. 한 사람을 향한 진실한 사랑도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데도 희생은 있습니다. 부부간 사이가 좋은 분들을 한 번 유심히 보십시오. 그 비결은 단순합니다. 서로 아껴주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서 희생할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부간 사이가 안 좋은 분들을 한 번 유심히 보십시오. 그 비결도 단순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리며 이기적인 태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도 희생은 따릅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일수록 희생이 더 큽니다. 한밤 중에 자다가도 울면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일어나서 아이를 달래줍니다. 똥기저귀 갈아주고,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아줍니다. 부모가 희생 없이 자녀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에서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섬김과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한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을 향한 실질적인 희생 즉 시간적 나눔, 물질적 나눔이 없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구체적인 희생 없이 머리 속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아무런 희생도 없이 마음 속에서만 사랑한다고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아기가 배고파서 울고 있는데도 젖병도 안 물려주고 “난 우리 아기를 참 사랑하지…”하고 생각만하고 있다면 그가 어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한 겨울에 춥다고 울고 있는데, blanket도 안 덮어주고 “난 우리 아기가 따뜻했으면 좋겠어. 우리 아이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우리 아이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것을 보니, 난 정말로 우리 아기를 사랑하나 봐”하고 머리 속으로 생각만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모가 실상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정한 부모’이고, 무관심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만 생각과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인 섬김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인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평상시 전화 한 통 하나 없고, 코로나가 터졌는데도 부모인 내가 별일은 없는지, 식사는 잘 하고 있는지 아무런 연락도 하고 있지 않다면, 부모인 나는 “일 하느라 바빠서 그렇겠지…”하고 이해해줄 지 모르겠습니다만, 제3자가 보면, 그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에는 반드시 구체적인 섬김과 희생이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3장 17-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원망이나 불평 없이 섬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에서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라”고 권면한 점을 주의하십시오. 가만히 보면 주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고받는 사람들은 계속 받기만 합니다. 섬기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섬기고, 섬김 받는 사람들은 계속 섬김 받기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분명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즉 섬김과 대접을 받는 사람의 경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겸손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받되, 섬기는 이에게 최소한의 부담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또 다른 이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무리 한 사람의 성도가 매일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를 하루에 서너 시간 이상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이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성숙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영적 청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적 부모는 될 수 없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한 것 같은데도 믿음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 지 오래 되지 않습니까? 왜 열심히 하는데도 신앙이 정체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의 마음에 한 사람을 품고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 되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이 모두 영적 부모로 자라나길 소망합니다. “왜 난 안 챙겨줍니까?”하고 불평하는 영적 아이가 아니라, “내가 또 섬겨줄 사람은 없는가?”하고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영적 부모가 되길 축복합니다. ‘누가 나를 챙겨주는 사람 없나?’하고 섬김 받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다른 이들의 필요를 먼저 나서서 채워주고 내 것을 나누며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복됩니다. 상대방을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는 사람보다 더 성숙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 사람을 열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섬기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