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1 베드로전서 강해 (11) 기도하기 위해 근신하고,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4장 7-11절)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삶 속에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나 소망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셈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시라는 약속을 믿고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언제 즈음 다시 오실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천사도, 아들도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약 2천년 이후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은 2천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당장 오실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감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실 수 있겠다’는 안일한 마음이 은연 중에 깔려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지 불과 약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 밤이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다’는 긴장감과 기대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세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변함없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어떠한 것인지 오늘 본문 속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를 위하여 근신하라
첫째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한글 성경으로 읽으면 베드로의 권면이 ‘기도하라’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을 헬라어 원문의 의미에 맞게 다시 해석해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려라. 그리고 기도를 위해 맑은 정신을 유지하여라”가 됩니다. 즉 베드로의 권면은 ‘기도하라’가 아니라 ‘기도하기 위하여’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가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라’는 말과 ‘근신하라’는 말은 각각 무슨 뜻일까요?
먼저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통제된 마음을 가리킵니다. 즉 주변 상황이나 환경에 요동하지 않는 절제된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 친구들이 죄로 유혹해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로 인해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삶을 통제하는 상태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분별력’과 ‘자제심’을 갖고 있으라는 것이죠.
‘근신하라’는 말은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면 ‘술에 취해 있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는 절대 운전대를 맡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판단이 흐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사람이 어찌 올바르게 행동하고, 하나님께 바른 정신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기억하고, 근신하며 살아갈 것, 즉 ‘술에 취하여 살아가지 말고, 깨어 기도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욕심, 재물에 대한 탐심, 세상을 살아가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도에 큰 방해를 받게 됩니다. 또한 죄가 주는 짧지만 강렬한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도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죄가 기도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근신하라’라는 헬라어에는 1차적으로 ‘술에 취해 있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만, 또한 ‘정신을 맑게 하라’는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7절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이 말씀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기도에 방해받지 않도록 세상의 죄악과 유혹에 빠져 살아가지 말고, 언제나 영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바른 사고를 가지고 절제하며 살아가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혹시 요즘 우리들의 기도가 막혀 있지 않습니까? 꺼져 가는 불씨처럼 기도가 죽어버리진 않았습니까? 기도하려고 해도 자꾸만 딴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내 삶에서 기도는 사라지고 Youtube나 TV시청, 인터넷, 영화, 드라마, 게임, 스마트폰, 주식, 스포츠 활동 등 세상적인 향락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하루에 10분도 채 시간을 따로 때어 놓고 기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술에 취한 사람만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오락거리와 향락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이런 장면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한 여인을 무척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달려오는 트럭에 대신 몸을 던질 수도 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날아오는 총알도 대신 맞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 고백에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여인은 자신은 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화해도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를 않습니다. 일 때문에 바쁘면 문자라도 줄 수 있잖아요? “내가 지금 바빠서 미안해. 내가 이따가 일 끝나고 전화 할께!”라는 식의 연락도 한 번 해주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없이 주중에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주말이 되서야 전화가 옵니다. 그리고 딱 3분 전화하고 바로 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남자 정말 이 여자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함께 ‘quality time’(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죠. 사람들은 연애할 때 없는 시간도 쪼개서 만나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지내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 사람하고 장거리 연애하는 모습을 혹시 보신 적 있으십니까? 시차 때문에 때로는 밤 늦은 시간에, 때로는 남들 다 자는 새벽 이른 시간에도 일어나서 전화합니다. 상대방이 무척 보고 싶거든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말로만 하는 사랑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 그 누가 말로만 하는 사랑을 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 소식도 없다가 주말에 짠하고 나타나서 3-5분 전화하고 헤어지는 사람을 보고, 그 누가 저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면 매일 전화해야죠. 전화 못하면 문자라도 남겨야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반드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바빠도 틈내서 기도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쪼개고 만들어서라도 기도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는 데 시간도 장소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3절을 보니, 로마 병사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몽둥이로 많이 때렸습니다. 심하게 때린 후에 그를 감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의 발에는 차갑고 무거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밤중이 되자 바울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방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중에 빌립보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보다 기도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에 있으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그보다 기도하기 더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술에 취해 살아가듯이, 세상에 취해 살아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링 안에 들어간 권투 선수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기에 임하는 것과 같이 기도하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가 세상의 죄악에 취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뒷전으로 보낸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 여러분, 매일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참된 사랑함을 삶으로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서로 열심으로 사랑하라
두 번째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8,9,10절에 각각 ‘서로’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대접하라’,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서로’라는 것은 불신자들을 제외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이요 한 형제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디자인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무엇보다도”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표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서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사랑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교회 내에서의 사랑이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실하고 진지한 사랑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동시에 모든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 구성원 모든 사람에게 피상적인 사랑을 나눠주는 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한 번에 모든 사람을 피상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여 진실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소수의 사람을 택하여 그 사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선택하신 사역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3년 반 동안 공생애 기간 중 그들에게 집중하여 자신이 가진 시간의 70% 이상을 쏟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열 두 명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집중적으로 양육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와 동시에 회중을 대상으로 사역하셨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사마리아 여인, 나인성의 과부, 니고데모, 삭개오와 같이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과 1대1로 만나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사역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자신의 공생애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열 두명의 제자들에게 집중하시고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데 보내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동시에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삶의 방식은 결코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가 예수를 섬기도록 도와주고, 그가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섬깁니다. 그 사람이 영적 홀로서기가 가능한 영적청년으로 자라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고 양육할 수 있는 영적 부모로 성장하도록 도와줍니다. 그 후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에게 집중하여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또 다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한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진실하게 사랑하고자 품고 있는 그 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 진실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그 한 사람 없이, 피상적으로 모든 교인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하고 계신 분들은 교회 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피상적인 관계는 그 누구에도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십시오.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와 함께 진리 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누고 교제하다 보면, 반드시 상대편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몰랐던 단점이 새롭게 보이는 경우도 있고, 기존에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의 단점이 생각보다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진실하게 사랑하려고 하다 보면 반드시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상처받는 지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단점이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기 전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거나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는 다릅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죄가 우리를 아프게 찌르는 가시가 될 때에도, 우리는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8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상대방의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여기서 죄를 덮어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죄를 눈 감고 못 본 척 덮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친구가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는 것을 분명히 보고도, 모르쇠로 눈감아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상대방의 죄를 용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바꾸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죄는 분명 죄입니다. 어떻게 죄를 죄가 아니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보고도 방관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잠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고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타협 없이 죄라고 말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치명적인 실수와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용서해주고 용납해주는 자세와 태도가 바로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잠언 10:12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을 허물을 그 사람의 치명적인 단점도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할 때 성도는 그의 삶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은 그의 삶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연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완벽한 섭리를 믿습니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코너스톤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이 또한 주님의 뜻, 주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시죠? 하나님께서 이 교회 공동체에 우리를 보내신 이유는 이곳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를 동시에 피상적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진실로 사랑해야 하는 그 소수의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도록 그 사람을 진리 안에서 사랑해주십시오. 비록 그 사람의 허물이 보이고, 단점이 치명적이라 해도, 사랑으로 그의 허다한 죄를 덮어주십시오. 그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십시오. 그러한 삶을 통해 예수께서 나와 같이 이기적이고 못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고, 나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또 깨닫고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세상의 향락과 유혹을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 사람을 진실되이 사랑하십시오. 주일학교 교사 분들은 주일학교 학생 한 명을 택하시고, 그를 진실되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순장분들은 순원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진실되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아직 어떤 사역에 임하지 않는 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한 사람을 마음 속으로 품고 그를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오. 이를 통해 코너스톤 교회 안에 피상적인 사랑은 그치고, 진실한 사랑이 가득하여 주님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교회, 주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