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4 베드로전서 강해 (10) 선행 중의 고난도 참으면 하나님께 귀한 것이 됨 (베드로전서 2장 18-25절)

신약시대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다양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는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중 ‘빌레몬서’는 주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로써, 도망쳐던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노예가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는 바울의 요청 편지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들을 통해 초대교회에는 노예로 살아가는 성도와 자유인인 성도, 그리고 노예의 주인들도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상당수가 가정에 속한 노예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특별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베드로전서 2장 18-25절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초대 교회 안에 있는 노예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르치고 있는 이 내용은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1. 선행 중에 고난이 있어도 주를 위해 참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
본문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8절 말씀은 “사환들아”라는 부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말로 바꾸어서 말하면 “하인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이란 뜻입니다. 베드로는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주인이 선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든지 아니면 까다로운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노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변함없이 그들의 주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18절에 “까다로운 자”란 말은 성격이 ‘비뚤어진 사람’, ‘심술궂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불신자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서 정직하지 않고, 진실되지 않은 사람인 경우를 가리킵니다. 또한 “까다로운 자”란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고, 강자에게는 굽신거리지만,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비인격적이고 혹독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미성숙하고 까탈스러운 주인 밑에서 하인으로서 매일 함께 살아가고 그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하인으로서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이와 같은 경우에도 그의 하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덕이 되고 모범이 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운 덕이 세상 가운데 널리 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인과 노예 관계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는 여전히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가게나 직장에서의 고용주가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고 아랫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서는 사람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반대로 “까다로운 자”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비인격적인 태도로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욕심에 따라 비뚤어진 자세로 사람을 대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고용주 밑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용주의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태도 때문에 말은 못해도 때로는 속으로 분노와 화가 불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까다로운 자”들에게까지도 선을 행하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가게나 직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불신자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의 모습이 저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 예수를 욕하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는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성도들이 선행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여기서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란 표현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까다로운 주인으로 인해서 그 가정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감수해야 하는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을 가리킵니다. 왜 일터에서 미성숙한 사람들하고 일하다 보면 억울한 일,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손이 부르르 떨리고, 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이 분노의 감정이 욱하고 올라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때 두 가지 선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는 악으로 악을 갚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상대에게 똑같이 미성숙한 방법으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방법을 권면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 가운데도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후자의 길을 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당한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선을 유지하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가르침은 그의 편지 전체에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은 치가 떨리고, 부아가 치밀고, 악이 받치는 일을 당했을 때 악을 악으로 갚아주라고 가르칩니다. 욕을 한 사람에게는 욕으로 갚아주고, 폭력은 폭력으로 갚아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 이것이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사도 베드로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 17절, 21절을 각각 읽겠습니다. “(롬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도 바울 역시 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가 있으면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꾸준하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순간 우리들도 그와 똑같은 악인이 됩니다. 그것은 내 영혼에 범죄하는 것이며,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자를 향하여 선한 일을 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베드로전서 2장 19절을 봅시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까다로운 주인”을 만나서 그의 가정 노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 부당한 고난을 받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크게 세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겪고 있는 부당한 고통과, 억울한 시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또한 하나님께서 내가 불의한 주인 밑에서 부당하게 겪는 고통의 현장 가운데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불의한 주인 아래에서 부당하게 겪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을 결국 심판자 하나님께서 공의로 갚아 주실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때로는 남몰래 눈물도 훔치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도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고 있는 부당한 고난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지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가 까다로운 주인을 잘못 만나서 선행 가운데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끝까지 선을 행하는 모습이 하나님 보실 때 아름답다고 19절과 20절에 두 번이나 걸쳐서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다’ 또는 ‘귀하게 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죄밖에 없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게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넌 참 귀한 삶을 살아가는구나?”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인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아름답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칭찬받는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성경’판으로 누가복음 6장 32-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눅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내 눈에 사랑스럽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모르고 안 믿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실 때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내 삶 속에서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슬픔을 참고 계속해서 선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그러한 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까다로운 주인들을 만나도 그들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미성숙한 자들이 주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 귀한 것,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 하나님 보실 때 전혀 아름답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에게 고난을 받기는 하는데, 그 원인이 자신이 저지른 과오나 죄 때문인 경우입니다. 20절 말씀을 봅시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저질러서 주인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당하게 되고, 그것을 인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불명예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 상반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는 가운데 받는 고난을 감수하는 삶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감내해야 할 필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21절 말씀대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행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받는 부당한 고통, 억울한 일들도 참고 견딤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간 주인의 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인간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귀한 삶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려운 시험과 고난 가운데서도 내 삶의 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항상 우리 앞에 모신 듯한 태도와 자세로 주님이 칭찬하실 만한 선행을 행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드릴만한 일들을 선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2. 애매한 고난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
이제 베드로는 앞서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삶, 즉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여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을 통해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십니다.

Q1. 그렇다면 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애매한 고난 즉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로 여기셨다면, 예수님께서 고난당해야 할 일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죄인들을 사랑하사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이와 같은 자신의 삶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마땅히 따라야 할 모범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21절에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올 수 있도록 ‘자취’를 남겨 주셨습니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그 눈 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그 발자국은 앞서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 또 어느 정도 힘을 들여 걸었는지, 어느 정도의 보폭으로 걸어갔는지 다 보여줍니다. 21절에서 사용한 ‘자취’가 바로 주님의 ‘발자취’(발자국) 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가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예수의 삶을 배우고, 그분께서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의 극한 고통을 참고 인내하심으로 승리하신 모범을 보여주셨고, 그를 믿고 따르는 구원받은 자녀들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부당한 고난을 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사형수가 되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부당한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한들, 어찌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우리들도 그 분의 발자국을 따라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말고 선행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승리의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Q2.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당한 고난을 받으실 때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첫째로, 주님은 부당하게 욕을 받으셨으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보십시오.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비방하고 욕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욕을 당하는 동안에도, 내내 한 번도 맞받아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계속되는 희롱과 모욕적인 언행 앞에서도 입을 굳게 닫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5-20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함께 봅시다.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서 ‘새번역성경’을 읽겠습니다. “(막 15:15)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다. (막 15:16) 병사들이 예수를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 곳은 총독 공관이었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켰다. (막 15:17) 그런 다음에 그들은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뒤에, (막 15:18)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저마다 인사하였다. (막 15:19)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막 15:20) 이렇게 예수를 희롱한 다음에, 그들은 자색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혔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주먹으로 주님의 머리를 치고, 손바닥으로 주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러한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9-32절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새번역성경’입니다. “(막 15: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막 15: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막 15: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며 그를 모욕했습니다. 32절에 보니,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들조차도 그를 모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두 죄수 모두 주를 모욕했다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에서는 둘 중 한 사람만 주님을 비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기도하시는 기도를 들은 한 강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것이라면 결코 두 본문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사람들에게 모욕 당하시고 조롱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욕을 당하셨음에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때때로 아무런 정당한 근거 없이 우리들을 향해 말로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본을 따라 모욕을 당해도 모욕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우리 주님은 부당한 이유로 고난당하셨으나,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자들을 향해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잠잠히 인내하셨습니다. 주님은 힘이 있으셨으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셨고, 권세가 있으셨으나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44절 말씀입니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세상의 생존 방식은 ‘승리해야 이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야 이기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항상 이겨야 한다고만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 안에서 ‘지는 연습’을 하십시오. 스키 배울 때는 넘어지는 것부터 배웁니다. 유도 배울 때는 낙법부터 배웁니다. 마귀는 죽어라 이기려 했으나 결국 졌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낮아짐, 인내, 희생, 섬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위협을 받으실 때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다시 한번 베드로전서 2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부당한 이유로 당하는 억울한 고난을 직접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무고하게 고난과 박해 받고 있는 성도들의 삶에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 모든 부당한 고난들을 참고, 끝까지 자신의 맡은 바 사명과 하나님의 뜻인 선을 행하심과 같이, 주를 믿고 따르는 우리 성도들도 선을 행함으로 받는 모든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끝까지 선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모욕과 조롱 당하는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 말씀을 기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끝까지 선을 행합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원수들을 오히려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나머지 모든 것은 정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께서 ‘귀하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 믿음의 태도를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