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7 베드로전서 강해 (9) 인간의 제도와 위정자들에 대한 태도

1. 그리스도인에 대한 오해
베드로전서가 쓰였을 당시,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웃들에게 조롱당하거나 외면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군사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제국 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다’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데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내에서 유일한 왕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따라서 로마 황제 말고 또 다른 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국에 대한 저항세력이며, 반대 세력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이유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에서 행해지던 성만찬도 사람들의 오해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성만찬 때 모여 빵과 잔을 나눕니다. 빵을 나누며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하고 말하고, 포도주 잔을 나누며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흘리신 피입니다.”하고 말합니다. 물론 빵과 잔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 실제 주님의 몸과 피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만찬이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 풍습을 가진 잔인한 야만인들, 불순집단, 괴상한 사이비 집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로마 제국 내 시민들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신분이나 사회 계층을 초월하여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인들은 ‘근친상간’하는 무리로 오해하였고, 결국 성적으로도 문란한 사람들이란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박해의 이유는 기독교가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로마는 다신교 사상이 강했습니다.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아프로디테, 아테네 등 우리가 이름을 많이 들어본 신들이 로마 제국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 황제들은 자신을 신의 아들 혹은 신이라 지칭하며 황제 숭배 사상을 전파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다신교 사상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신이 하나 밖에 없고, 그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시민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고 손가락질당하고 온갖 조롱과 박해를 받는 큰 어려움에 몰리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고,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맞서 싸우거나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와 같은 길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님을 가르쳤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또한 교회가 악한 일을 행하는 구실 밖에 되지 않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비록 교회가 로마 제국 내에서 악한 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서 살아가며 선한 행실을 함으로써 로마 시민들이 가진 교회에 대한 오해를 풀고, 성도들의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욕도 당하고 수치를 당한다 해도, 그들을 말이나 힘으로 싸워서 대적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선한 행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2. 국가의 제도를 ‘주를 위하여’ 따르라.
사도 베드로는 베르도전서 2장 13절부터 3장 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로마 제국 내에서 시민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권면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이 세운 제도에 복종하고, 왕과 왕이 파송한 자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13-14절 말씀입니다.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속한 국가가 제정한 법과 질서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핍박 받으며 고통에 시달리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는 신앙을 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국가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제3안을 제시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박해를 인내함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위로하면서, 그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지켜야 할 의무에 충성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한 사회가 함께 정한 제도와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에서도 국가의 운영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관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도 세금을 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며, 로마 제국에 세금 내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야합니까? 말아야합니까?’ 물어보았습니다. 이 장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막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 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하고 물어본 이에게,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 사회에서 정한 질서와 법에 따라 살아가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시는 또 다른 장면이 마태복음 17장에 있습니다. “(마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마 17: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세금으로 내신 ‘반 세겔’은 로마 제국에 전달하는 세금이 아닙니다. 성전의 유지와 보수를 위해서 율법에 부과된 대로 돈을 거두어들이는 ‘성전세’입니다. 출애굽기 30장 13절 말씀에 따라 20세 이상 성인 남자들은 매년 반 세겔을 바쳐야 했습니다. 성경 역사가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성인 남성 25세부터 50세까지 유대인 모든 남자들이 매년 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전세를 통해 성전에서 아침, 저녁으로 피우는 향을 사고, 빵을 진설하고, 제사장의 옷을 제작하고,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구입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폐 단위 중에,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이 받는 하루치 임금에 해당합니다. ‘세겔’은 이틀 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미국에서 하루 일해서 약 $100불을 번다고 가정하면 예수님께서 이틀치 노동자의 품삯인 $200을 세금으로 내신 것입니다. 참고로 ‘성전세’는 부자라고 더 내거나, 가난한 사람이라고 덜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반 세겔을 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의 참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위한 세금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셨을까요? 그 해답이 마태복음 17장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가 저들에게 길 가운데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나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셨다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성전세를 내지 않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신성모독이라 불쾌감을 느끼고 예수님을 향해 분개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방해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케 하다’라는 말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다’, ‘걸림이 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사람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금을 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 국가가 제정해 놓은 질서와 제도에 따를 것을 권면했습니다. 국가가 하라는 것은 하고, 국가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태도가 되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순응하는 것은 맹목적인 순종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베드로는 성도가 인간이 세운 제도를 따르며 살아가되, 누구를 위하여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주를 위하여’입니다. 만일 인간이 세운 제도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제운 제도와 시스템이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면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대의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 사람들에게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것은 비록 국가의 명령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순응하거나 따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와 가장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다니엘서에 기록된 금 신상에 숭배하기를 거부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된 큰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신상 제막식에는 지방장관, 행정관, 총독, 재무관, 재판관, 법률가, 지방의 모든 관원이 모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왕의 전령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들으시오! 앞으로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양금 등 온갖 악기 소리가 나면 모두 엎드려 느부갓네살 왕이 세우신 황금 신상에 절해야 할 것이오! 이것은 어명이오!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활활 불타오르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팔 소리, 피리 소리, 수금 소리 등 온갖 악기 소리가 들리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성경학자들은 ‘왜 여기에 다니엘은 없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금신상에 절을 해야 했던 관직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지방 관직입니다. 따라서 중앙정부에서 일하던 다니엘의 직책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다니엘은 금신상에게 절해야 할 의무가 없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했다는 소식을 들은 느부갓네살 왕은 극히 분노하여 그들을 포박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준비하고 있다가 음악과 악기 소리가 들릴 때 절하면 너희를 살려주겠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절하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내겠느냐?” 이에 대한 세 친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다니엘서 3장 16-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말했습니다. “왕이여, 이 일에 대해 왕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절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활활 타는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왕의 손에서 구해 내실 것입니다. 왕이여,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거나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줄 아십시오.” 이 세 사람은 다니엘서 2장 49절을 보면 바벨론의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평상시에 바벨론이 세운 질서와 법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으며, 자신들도 그 제도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지정한 제도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위배되자 더 이상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삶의 모습입니다. 로마 제국 내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로마가 세운 법과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나 만일 국가의 법과 질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면 그 법은 결코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사도 베드로 역시 그러한 태도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권위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죠. 이는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4장 18-20절 말씀입니다. “(행 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는 평생 유대인의 법과 질서에 따라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무리 유대인 최고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경우 결코 따를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국가가 제정한 법과 질서를 따라 살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을 위한 순응으로써 만일 국가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명령을 하는 경우에는,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쳤습니다. 만일 국가가 하나님의 진리에 거스르는 것을 요구한다면, 국가의 권위보다 더 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세상 정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와 의무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현재 미국 낙태, 동성결혼 문제에 대해서)

3. 권세 있는 자들에 대한 태도: 순복과 공경
이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 있는 자들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자세와 태도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14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여기서 방백이란 로마 황제가 소아시아 및 다른 식민지들을 지배하기 위해 파송한 ‘총독’들을 의미합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도지사요, 미국은 주지사들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문에서 언급한 왕과 그가 보낸 방백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 운영에 필요한 행정, 사법, 입법을 책임지는 공무원들입니다. 14절에 베드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은 잡아서 재판을 통해 벌을 주고, 착하게 살아가는 선량한 시민들에게는 삶의 평안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로 인해서 사회의 범죄, 무질서, 불의 등 모든 악행이 처벌받고, 시민들은 그들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베드로는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들이 정한 제도와 법규에 순응하여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가르침은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바울은 세상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정해 놓은 법과 질서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갈 것을 권면했습니다.
또한 17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이러한 자들을 공경하고 살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경은 위정자들이 불신자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고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위정자들을 존중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세상을 다스리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가능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며, 선한 행실로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4. 선행으로 악을 이기라
이처럼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행동들을 통하여 사회 속에서 모범이 될 때 불신자들의 비난과 오해가 잠잠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5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한 것이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와 같은 불신자들의 말을 베드로는 ‘무식한 말’이라 표현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막는 방법은 선행을 통해서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선을 통한 대항입니다. 로마서 12장 19-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세상에서 불신자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나, 우리 삶의 방식은 그들과 전혀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들도 한 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 나라의 질서와 법에 순응하며 위정자들이 정한 제도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한 제도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제도에는 불복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일상의 현장에서 모범적인 삶과 선행을 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로 인해 저들이 우리 믿음을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 가운데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살아가야합니다. 이와 같은 선한 행실들을 통해 우리가 속한 사회 공동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