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8 베드로전서 강해 (8) 육체적 정욕을 멀리하고, 선한 행실을 나타내라.

1.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을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나그네’란 단어는 고국이 아닌 외국 땅에 잠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는 관광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 교육을 위해 유학 온 학생들, 일하기 위해 온 사람들 등 해외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입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미국에서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취득하여 장기적으로 머물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자신이 미국에 온 목적이 다하게 되면 떠나온 고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나그네’란 단어가 바로 이처럼 ‘외국 땅에 잠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 ‘나그네’라고 번역된 단어를 영어성경 NASB는 ‘aliens’ 즉 ‘외국인 체류자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 시민권자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시민권자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와 같이 성경은 성도의 시민권은 하나님나라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믿고 따라 살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자이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잠시 여행 올 때 ‘원’을 달러로 환전해옵니다. 반대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여행 갈 때 달러를 원으로 환전해갑니다. 이 때 자신의 전재산을 타국의 통화로 환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 갔다가 다시 내가 사는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타국으로 완전히 이민을 간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국에서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땅도 팔고 미국으로 옵니다. 왜냐하면 삶의 터전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외국인 체류자들로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 천국으로 이민 가서 영원토록 살게 될 천국 시민권자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무는 임시 처소입니다. 각 사람은 이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다 차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의 본향이 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소천하셨다’란 표현을 씁니다. ‘소천’(召天), 말 그대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시편 90편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한 사람의 일생은 70년이고 힘이 있으면 80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에는 의료 기술이 좋아져서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 잘 믿으며 믿음으로 살아간 자들은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고, 반대로 예수님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 자들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 은퇴 이후 노후를 걱정하며 노후를 준비하며 삽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삶 영적인 노후의 준비는 잘 안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영원한 삶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천국으로 영원히 이민 갈 준비를 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두 가지 내용을 권면합니다. 하나는 내면적인 권면이고, 다른 하나는 외면적인 권면입니다. 내면적으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 외면적으로는 선한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이 되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통해 각각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첫째로, 사도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합니다.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육체의 정욕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세속적인 욕구’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구와 욕망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육체의 정욕’을 ‘sinful desires’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욕망이 한 두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 칼빈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켜 ‘우상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처럼 하나님 말고 세상 다른 것들로부터 참된 만족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우상들을 만들어가고 공장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 사용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에서 ‘제어하다’란 말은 ‘중단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공장의 가동을 당장 멈추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 밖에서 참된 만족을 얻으려 하는 시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황금 만능주의시대’ 혹은 ‘물질 만능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더 많이 갖고 소유하기 위해 온갖 힘을 쓰며 돈을 좇아 살아갑니다. 물질 만능 시대에서는 돈벌이가 된다면 양심을 속이는 일이나, 비도덕적인 일이나,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도 무엇이든 하겠다는 삶의 방식과 태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의 더욱 안락한 삶을 위해 명예, 권력, 학력, 재력을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삶의 방식이 바로 육체의 욕망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우리 보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집도 없이 방랑자처럼 살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재산을 불릴까?’하는 것이 우리 삶의 주된 관심사가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삶의 많은 에너지와 관심을 주님께 드리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자신을 가꾸어 날마다 일상의 현장 속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돈에 눈이 멀어 한평생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성도들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깨닫고, 돈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힘을 가진 권력자들 앞에서 비굴하게 허리를 숙이고, 힘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잘못된 일에도 눈을 감고 그 앞에서 떡고물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갈 때,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도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 다스릴 것을 당당하게 견지하며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 있는 연애인들과 유명인들의 인생에 집중할 때, 성도는 도리어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사람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 외로운 자들을 찾아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그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명예도, 보상도 없어도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여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삶의 결단이 바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코너스톤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자꾸만 하나님 말고 세상 다른 것들로부터 참된 만족을 찾으려 하는 시도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돈과 재물입니까? 건강한 육체입니까? 자식의 성공입니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명예입니까? 사람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입니까? 세상의 죄악들이 주는 짧은 쾌락입니까?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성도인 우리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죄로 가득 찬 본성이 남아 있기에 그 욕심들을 ‘제어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11절 말씀처럼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거슬려 싸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자꾸만 거스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새롭게 거듭난 의지가 있지만 동시에 이전에 세상을 따라 살던 악한 옛 자아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의지와 옛 자아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끊임없이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의 마음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은 바로 인간 내면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언뜻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외부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내면에 있는 문제에 있습니다. 인간은 그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이 지은 죄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가 내면의 정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외부에서 오는 유혹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기중심성’ 곧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탐심’이 곧 인간의 모든 죄를 낳은 것입니다.
어떻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제어하자, 제어하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자”하고 그렇게 마음으로 수백 번 결단하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요. 사람의 마음이란 작심삼일입니다. 아니 하루에도 수백 번 뒤집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침 때와 저녁 때 달라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평상시에는 인자하고 예의 바르고 가족들에게도 참 잘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술버릇이 고약합니다.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립니다.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이미 잠든 자식들을 다 깨우고 얼굴을 붉혀가며 험한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냅니다. 다음 날 아침, 술 깨면 후회막심입니다. “내가 이제 두 번 다시 술 마시나 바라! 내가 또 술 마시면 인간이 아니고 개다!” 그렇게 결심하고 또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 다시 후회할 줄 알면서도 술 마시고 있습니다. 담배 끊으려는 사람도 그러고요. 도박 중독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두고 습관적으로 바람피는 나쁜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하면서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육체의 정욕을 자신이 제어하지를 못합니다. 잠언 26장 11절을 봅시다. “(잠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도로 먹는 행위는 얼마나 더럽고 역겹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이 마치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자신이 토한 죄를 다시 먹으러 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이와 같은 모습이 불신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 가운데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이제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던 모습을 부인하고 새로운 거듭난 의지를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 세상 습관에 그대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 사도 베드로가 한 말을 들어봅시다. 베드로후서 2장 20-22절 말씀을 ‘쉬운성경’ 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벧후 2:20)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죄악에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그 악한 생활로 되돌아가 세상 죄에 끌려 다닌다면, 그 상태는 이전보다도 훨씬 나쁠 것입니다. (벧후 2:21) 차라리 바른 길을 모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바른 길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거룩한 가르침을 내팽개쳐 버린다면, 오히려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낫습니다. (벧후 2:22)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는 씻은 후에 다시 진흙탕에서 뒹군다” 라는 속담이 그들에게 들어맞는 것입니다.” 마음 속 결단만으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나쁜 생각 품지 말고 착하게 살아가라” 만일 이것이 죄를 싸워 이기는 방법이라면 유치원 때 이미 우리는 다 배운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도 시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육체의 욕심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식사기도와 같은 짧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깊은 기도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영혼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만일 내 삶 속에서 기도가 없고, 말씀이 없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보일지 모르나, 일상 속에서 말씀 없이, 기도 없이 충분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일상은 보지 않아도 분명 육체의 정욕을 위한 삶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결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신앙생활인지 몰라도 실상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그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비결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비결은 기도와 말씀뿐입니다. 이 두가지 없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계십니까? 제가 목회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혼자서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양육과 훈련하는 일에 제 삶을 헌신했습니다. 한 분 한 분 만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말씀보는 것을 훈련시킵니다. 그로 인해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매주 말씀을 암송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한 분 한 분 늘어나고 있습니다. 날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는 것… 오직 그것 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직 그것 만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 선한 행실을 하라
사도 베드로의 첫번째 권면이 ‘내면적인 것’, 즉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권면은 ‘외면적인 것’, 즉 선한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2절을 보니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활동하던 1세기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이들에게 악한 사람들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먼저,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갔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향한 반역 세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 황제를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칭할 때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 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또 다른 임금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 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로마 황제에 대한 불순한 반역 세력으로 여겨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성만찬이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 때 모여 빵과 잔을 나눕니다. 빵을 나누며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하고 말하고, 포도주 잔을 나누며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흘리신 피입니다.”하고 말합니다. 물론 빵과 잔은 예수님의 몸과 잔을 상징할 뿐, 실제 주님의 몸과 피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만찬이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잔인한 야만인들, 불순집단, 사이비 집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이방인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비방했고, 성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이방인들에게 무고한 비방을 받는 상황 속에서 오늘 이 말씀을 권면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악한 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으나, 그들 중에서 선한 행실을 함으로써 오해를 풀고, 성도들의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욕도 당하고 수치를 당한다 해도, 그들을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선한 행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믿지 않는 자들이 ‘과연 저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선하게 살아가게 하시는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라고 감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세상과 다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 이익이 달린 순간, 내 목숨이 달린 위급한 순간에는 세상과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세상은 우리를 보며 “교회 다니는 사람도 별거 없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똑같네!”하고 속으로 비난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현장에서도 선한 행실을 차곡차곡 쌓으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나타나는 세상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보고, 칭찬합니다. “역시 예수님 믿는 사람은 다르군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리를 보고 조롱합니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살아? 더 쉽고 편한 길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향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4-5절 말씀입니다. ‘쉬운성경’ 번역본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4) 믿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탕한 생활에 끼어들지 않는 여러분을 이상히 여길 것입니다. 또 경멸하고 비웃기도 할 것입니다. (벧전 4:5)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실을 하여 가정, 직장, 학교, 가게,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다 칭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을 보고도 조롱하고 비웃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은 결국에는 그런 자들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 심판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선한 행실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내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양심을 따라 살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려울 때도 있고,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육체적으로 더 피곤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와 같이 선한 행실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이러한 선한 행실을 통해 세상 사람들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권고하시는 날’을 지금 현세로 해석하면, 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선한 행실을 보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일을 위해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 나도 믿어보고 싶습니다.”하게끔 살라는 것입니다. 또 12절에 나오는 ‘권고하시는 날’을 미래의 마지막 날로 해석한다면, 저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옳으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 옳았습니다.”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나그네, 즉 외국인 체류자들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그날 우리 모두는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부터 하나님나라로 이민 갈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두 가지를 준비하며 살아가십시오. 첫째,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십시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은 오직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살아갈 때만이 가능합니다. 둘째, 주어진 일상 속에서 선한 행실을 하십시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세상 속에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