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4 베드로전서 강해 (6) 말씀을 사모하라 (베드로전서 1장 23절-2장 3절)

1. 성도의 정체성: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 거듭난 자
사도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회심하도록 만든 것이 썩지 아니하는 씨, 즉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록하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 밭은 길가 같아서 씨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어 말씀의 씨가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고, 우리가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란 사실과 이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 분명합니다.
곧이어 베드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짧은 인간의 삶을 비교하여 보여줍니다. 24-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여기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구약성경의 이사야 40장 6-8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말씀도 한 번 볼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문맥에서 보자면 본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인간의 도움은 약하고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구원(해방)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받아서 읽게 될 수신자 그리스도 형제 자매들이 복음 때문에 핍박 받으며 흩어져 나그네처럼 살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저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드시 구원하신 것과 같이, 동일하게 현재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며, 어려운 처지에 살아가고 있는 주님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또한 구원하실 것이란 위로를 전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나오는 ‘풀’이란 잠시 있다가 죽게 될 인간의 한계를 나타냅니다. 풀이란 것이 짧으면 한 계절, 길면 1년, 한 때 한 철 있다가 시들어 죽는 식물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풀과 같이 약하고 생명력이 길지 못한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얻고 누리는 모든 영광은 풀 가운데 피어나는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꽃이란 풀과 마찬가지로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활짝 핀 붉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는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인간이 자랑하는 그의 많은 재산도, 소유물도, 위대한 업적도, 높은 권력도,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사라져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연약하고 시간이 지나면 썩어 사라질 것들을 의지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이 세상 끝까지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은 풀처럼 곧 시들어 버릴 우리 인간을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영원토록 썩지 않는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거듭난 주님의 사람들은 이제 풀과 같이 시들어갈 육체와 조금 있으면 사라질 꽃과 같은 인생의 영광에만 전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만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가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대열에 오른 레오 톨스토이, 그가 쓴 작품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하루는 구두 수선공 시몬의 가게에 부자가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가져 온 아주 값비싼 가죽을 보여주며 1년 동안 신어도 찢어지지 않는 최고급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어떻게 이 구두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부자의 집에서 하인 한 사람이 가게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무언가 다른 것을 더 추가로 주문하려고 하나보다하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에 하인이 이야기합니다. “저희 주인 어르신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구두는 필요 없습니다. 죽은 어르신에게 신겨드릴 샌들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소설 작품에는 구두 수선공 시몬의 가게에서 일하는 미하일이란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미하일은 부자가 값비싼 가죽을 시몬의 가게에 들고 와서 최고급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그의 뒤에 있는 죽음의 천사를 보며 부자가 얼마 후 죽게 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책 속에서 미하일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일 년 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오늘 저녁까지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모르는구나…”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이야기하듯이,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삶을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신의 삶이 이 세상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지만, 실상은 내일 당장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은 짧고 연약하기에 육체적인 일에만 전념하고 살아가지 말고 세상의 악한 것들을 모두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2. 버려라: 거듭난 사람들은 어떠한 행동을 버려야 하는가?
자, 그럼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백성들이 버려야 한다고 권면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그 목록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 말씀입니다.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먼저 2장 1절의 마지막 단어인 ‘버리고’를 주목해 봅시다. 2장 1절의 ‘버리라’ 단어는 2장 2절의 ‘사모하라’라는 단어와 대조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버리라’는 표현은 사람이 자신의 옷을 벗을 때 사용합니다. 즉 사람이 흙투성이가 된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이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벗어버려야 하는 악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듭난 성도가 버려야 하는, 더러운 옷과 같이 벗어버려야 하는 악한 것들을 세가지 범주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로, 모든 악독 / 둘째로, 궤휼과 외식과 시기 / 셋째로, 모든 비방하는 말 입니다. 먼저 ‘악독’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악한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해하려고 하는 무자비한 행동들입니다.
둘째로 ‘궤휼’은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쉬운 말로 바꾸면 ‘속임수’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타인을 속이려는 부정직한 행동입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죄입니다. 배우가 연기하듯이 사람들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죄입니다. ‘시기’는 이해하기 쉽게 바꾸면 ‘질투’를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도 시기는 존재합니다. 인간의 질투심은 끝이 없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 아파하고, 잘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봅니다. 시기와 질투의 죄악은 심지어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 가운데도 존재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 앉은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인지 논쟁하고 말다툼하였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베드로는 자신과 요한 중에 누가 더 존귀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궁금해했습니다. 인간의 질투심은 끝이 없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질투는 모든 사회 봉사단체와 모든 종교 단체에서 끊임없는 골치거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선한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질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죠. 또 다른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교회 일에 종사해 보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이 사실 질투에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분쟁과 다툼의 원인을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질투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이러한 시기와 질투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셋째가 모든 비방하는 말입니다. 이는 남을 무고히 해하기 위해 그에 대해서 악담을 퍼트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방하는 말은 앞에서 말한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개인적인 약점에 대해서 세세하게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잠언 18장 8절을 보면 “(잠 18: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이것을 더 이해하기 쉽게 바꾸어 해석하면 “(잠 18:8) 고자질은 맛있는 음식 같아서 마음 깊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에 대한 험담은 값싼 불량식품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Junk food’ 입니다. 먹을 때는 맛있을지 모르지만, 속에서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남의 험담을 들을 때는 귀 기울여 호기심을 갖고 듣지만, 그것이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화가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방향으로 빠져서는 안된다고 경고합니다. 참된 친구는 서로 뒤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퍼뜨리지 않는 법입니다. 참된 친구는 친구의 약점을 덮어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의 명성을 땅에 떨어트리는 말,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말… 남의 뒷말과 소문을 접했을 때 그것을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남을 비방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을 뒤에서 험담하기 보다, 그를 사랑으로 감싸주십시오. 비방하는 말은 우리가 반드시 벗어버려야 하는 죄악입니다.

3. 사모하라: 거듭난 사람들이 마음 속 간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 이처럼 베드로는 2장 1절에서 거듭난 주의 성도들이 벗어버려야 하는 죄악 5가지를 언급한 이후, 2장 2절에서는 반대로 우리 거듭난 자들이 사모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마치 갓 태어난 아이로 비유했습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간절하게 찾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부담되지 않고 오히려 즐겁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은 얼마 전 새롭게 교회에 등록하거나 최근에 예수를 새롭게 믿게 된 초신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쓴 이 편지를 읽게 될 독자들 중에는 길게는 지난 30년 이상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고 긴 신앙의 연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숙하지 못하고 영적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글을 보아도 거듭났으나 여전히 영적으로 자라야 하는 영적 어린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우리는 영적 어른 입니까? 아니면 영적 어린이입니까? 신앙생활을 30년 이상 해도 여전히 영적 어린이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수 혹은 그 사람의 교회 직분이 그의 영적 성숙도를 보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것으로 그의 영적 성숙도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영적 어린이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말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내는 지식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말씀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내용이 히브리서 5장 12-14절 말씀에 있습니다.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영적 어린이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결과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따라서 분명 거듭난 사람이지만, 행실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벗어버려야 하는 세상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 나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절에서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아무리 그것이 좋아 보여도 거기에는 죄악과 거짓의 불순물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합니다. 시편 12편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털끝만치도 없는 무용한 것이나 해로운 것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순금과 같은 말씀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사용된 ‘신령한 젖’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인 말씀’이란 뜻도 있습니다만, 동시에 ‘사리와 이치에 맞는 말씀’이란 뜻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딱 맞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이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는 이야기이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자신의 삶과 별로 연관성이 없고, 배워도 별로 쓸모 없는 내용이라고까지 치부합니다. 그러나 성경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리와 이치에 맞는 말씀은 없습니다. 세상과 인간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지 보여주고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가 성경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9편 7-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며, 우리 마음을 기쁘게 만들어 주고, 우리 눈을 지혜롭게 밝게 만들어 줍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삶의 이유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까?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평강과 인내를 낳게 합니까? 우리 인간은 왜 소망을 가져야 합니까?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고, 이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고 보람참 인생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왜 우리는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어느 산부인과에서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평생토록 건강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날마다 음식을 제 때 잘 먹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고, 먹지 못해 병들고 심각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거의 하루 종일 젖을 먹으므로 체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거듭난 자들은 경건한 삶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또 맛보아라!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또 그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말씀을 사모하는 선순환의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3절입니다.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엄마에게로 젖달라고 달려갑니다. 어머니의 젖을 먹어 본 갓난아이들이 다시 그 젖을 찾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은혜와 크신 능력을 맛본 거듭난 성도들은 다시 그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주님의 도우심,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맛보게 되면 그는 영적인 양식을 끊임없이 찾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의 꿈은 모두가 큰 형이나 큰 누나처럼 혹은 부모처럼 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자라기를 열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조금도 자라고 있지 않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적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필요를 깨닫고, 영적인 식욕을 말씀으로 채워간다면 우리 영혼은 자라날 것입니다.
사람 몸이란 것이 평상시에 어디 특별히 아픈 곳이 없고 건강해도, 앞으로 아프지 않고 병들지 않기 위해서, 더욱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해줘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계속해서 말씀을 먹음으로써 건강하게 자라갑니다. 우리 삶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주를 찾는데 게으른 생활을 하는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가 계속해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노력을 촉구하는 최대의 자극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맛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또 다시 말씀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이와 같은 말씀을 사모함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영적 선순환이 우리 모든 코너스톤교회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