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베드로전서 강해 (4) 거룩한 삶을 위한 권면 3 (배드로전서 1장 17-21절)

1.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께서 또한 모든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재판장’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친밀하신 아버지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시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판단하시는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세상 죄악을 멀리하며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7절 말씀을 보니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하실 때 그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란 일차적으로 그 사람의 생김새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외모’가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의 신분이나 출신성분 같은 외적 조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선악 간에 판단하실 때 절대로 이런 외적인 조건을 보고 편파적으로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잘못에 눈 감아 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죄를 지으면 그에 대한 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가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눈 감고 못 본 척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된 행위에 대해서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차별 없이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죄를 지으며 방자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결코 눈 감고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죄를 지어도 어차피 나중에 회개기도 하면 하나님께서 또 용서해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은 죄 짓고 나중에 기회 되면 회개하자.”하는 식의 안일한 마음으로 죄악을 행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악한 사람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는 자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욕한 자가 받을 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을 벌을 모두 면제받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짓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어찌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이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고백하며 이 세상에서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적 자녀라는 특권을 내세워 자기 멋대로 방자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눈 감고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갔는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에 사람의 행위를 선악 간에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지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그것에 지배 받으며 살아갑니다. 가난이 두려운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이 두려운 사람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세상에 속한 것들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죄악의 노예가 됩니다. 이러한 두려움들은 우리들에게서 참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또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은 우리에게 어떤 생명도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두려움을 ‘헛된 두려움’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헛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참 자유가 찾아옵니다. 더 이상 돈의 노예, 사람의 노예,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참 자유가 주어집니다.

2. 세상의 노예가 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세상의 노예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던 삶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구속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18절 말씀을 화면에 보여주십시오. 여기 기록된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이란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행실과 세속주의적 생활 양식을 가리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바로 이와 같은 삶을 따라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들을 ‘구속’해 주셨습니다. 18절에 사용된 ‘구속’이란 단어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 아래서 노예로 살아가던 자를 돈을 지불하고 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속박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로 죄악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고,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들을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은이나 금과 같은 금품으로 우리를 사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참 생명과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를 값으로 치르셨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 양을 가리킵니다. 모세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몹시도 괴롭혔고, 심지어 이스라엘 말살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칼로 죽이거나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했습니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학대 아래서 몹시도 괴로워했고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하기 바로 전 날 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고 일년 된 수컷 어린 양을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의 피를 받아서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에 죽음의 사자를 이집트 온 땅에 보내실 것인데, 만일 어떤 집의 문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다면 그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들어가지 아니하고 넘어갑니다.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넘어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한자로 ‘넘을 유’, ‘넘을 월’ 이렇게 넘어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죽음의 재앙이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집 안에 들어오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구원한 것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흘리신 피가 바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에게 뿌려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죽음의 재앙이 우리를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19절에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찬양할 때 ‘예수의 보혈’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미합니다.
본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악의 종으로써 악한 행실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이 우리에게 뿌리사 죽음의 재앙이 이제 우리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해방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들은 완전한 구속과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또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흠 없고 점 없는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은 임의적이고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미리 계획해 놓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차매, 예수를 보내사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이 20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계획은 세상이 죄로 인해 통제 불능 상태가 됨으로 인하여 뒤늦게 결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인들의 죄악을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3. 죽으신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우리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생명의 주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벧전 1: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정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후회하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복잡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 간결함과 단순함에 힘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해 집니다.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흠 없는 어린 양과 같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신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단순합니다. 그 구원의 주, 부활의 주를 위해 살아가십시오. 베드로는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대부분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길어지는 고난 가운데 믿음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힘든 현실 속에서 삶의 소망도 점차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그가 나눠준 위로는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죄악에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게 하시기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들이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구속 즉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말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신실한 자들로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할 대상은 돈도, 사람도, 이 세상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을 다스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우리가 더 이상 세상과 죄악의 노예로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그리하 때 우리는 고난 가운데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