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9 다시 하나님 사랑 앞으로 (3) (말라기 4장 1-6절)

(설교노트) 20210122 다시 하나님 사랑 앞으로 (2) (말라기 1장 6절 ~ 2장 16절)

말라기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오고 가는 6가지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간 처음 3가지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논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반박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근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논쟁으로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멸시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고, 하나님은 그들이 더러운 떡과 병든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셋째 논쟁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봉헌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젊은 날 결혼한 유대인 아내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죄를 물으셨습니다.

4) 이스라엘이 말로 하나님을 괴롭힘 (2장 17절 – 3장 5절)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펼쳐지는 네 번째 논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말로 나를 괴롭히느냐?” (Why have you wearied me with your words. / You make GOD tired with all your talk.) 이에 이스라엘이 질문합니다. “하나님 언제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까? 우리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너희가 분명히 말했다. ‘하나님 공의가 어디 있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가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오히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진짜 공의로우신 분 맞습니까?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내용이 말라기서 2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말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투 어디서 많이 듣던 말투 아닙니까? 바로 우리들의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하나님 왜 교회 안 다니는 내 친구는 저렇게 잘 살죠? 예수님 안 믿는 제 친구는 하는 일마다 다 잘 풀리고, 사업도 잘해서 돈도 잘 벌고, 자식들도 명문대 가고 걱정 없이 사는데, 왜 저는 하는 일마다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나님 정말 공의로우신 하나님 맞으세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바로 우리들의 죄악 아닙니까? 사실 한편으론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도 이해가 가죠? 왜요? 세상을 보니까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 같아 보여요. 편법을 쓰고, 악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높은 빌딩 건물도 몇 채나 소유하고 있고, 성 같이 큰 집에서 왕 같이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정말 공의로우신 분이 맞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악인들이 부자인 세상, 악인들이 건강하고 자식들도 명문대 나오고, 좋은 직장 취직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된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이런 질문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전혀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악인을 더 좋아하시죠?”하고 생각하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신앙무용론에 빠져 형식적인 신앙생활, 매너리즘에 빠진 예배 드리고 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과 삶이 하나님을 말로 괴롭게 한 것이죠. 혹시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인을 향한 동경과 부러움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시편 73편을 보면 아삽이란 사람도 이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 악인들이 잘 됩니까? 왜 악인들이 한 평생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을 때도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하십니까?” 공의로운 세상에 갈증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질문한 것이죠. “하나님 악인들이 형통하고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하고 계십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나도 안다. 지금 잠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야. 내가 직접 공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길을 예비할 사자를 보내고, 그 후에 이 문제를 해결할 언약의 사자 곧 메시아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바로 이 내용이 말라기 3장 1절 말씀입니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3장 1절에는 두 명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전반절에서 언급하는 ‘사자’는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자’입니다. 후반절에서 언급하는 언약의 사자는 모든 인류가 오기를 사모하는 구원자, 공의의 문제를 해결할 바로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이 메시아가 와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입니다. 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불과 같이, 옷을 더러운 떼로부터 씻기는 양잿물 같이 주의 백성들을 더러운 죄로부터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언약의 사자 즉 메시아입니다. 말라기 3장 3-4절을 봅시다. “(말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 3: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이 세상에 공의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분리시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 결과 이제 이스라엘의 제사와 제물은 다시 옛날과 같이 하나님께 기쁨으로 열납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메시아의 역할의 전부는 아닙니다. 공의를 이루시려면 악을 심판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공의로우신 분 맞습니까?”라고 질문했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익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직접 너희에게 갈 것이다!”는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메시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심으로 공의를 회복하시는 것이죠. 그 내용이 바로 3장 5절에 있습니다.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끝내 모든 악인들을 직접 심판하심으로써 공의를 완성하십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불행하게 살아가는 공의롭지 못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이 세상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를 믿는 백성들의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지 않는 모든 악인들은 그들의 악행을 하나도 남김없이 보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만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불공평해 보인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로 “하나님을 불공평합니다!”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마지막 때까지 주님은 심판을 유보하셨을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5) 하나님께 회개하라! (3장 6-12절)
자,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다섯 번째 논쟁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내게로 돌아와라” (Israel, come back to me!) “너희가 나를 떠났구나? 내게로 돌아와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스라엘이 대답합니다. “하나님 우리 보고 지금 회개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갑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았느냐?”, 이스라엘이 또 말합니다. “네? 저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요? 저희는 그런 적 없습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훔쳤습니까?” 하나님께서 또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십일조와 헌금을 도둑질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그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맞거든요. 그 동안 십일조, 봉헌물로 드려야 할 것, 몰래 빼돌리고 안 드리고 있었거든요. 자, 먼저 이 내용의 말씀을 봅시다. 말라기서 3장 7-8절입니다. “(말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구약성경 레위기 27장 3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얻는 모든 소출과 연간 수입의 1/10을 성전을 후원하기 위한 것으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자원하는 사람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께 드려야 할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의무를 등한시한 것이죠.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자,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만 지으면 복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먹고 살기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심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의 삶이 황폐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말씀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지었으나, 이스라엘이 십일조에 대한 책임을 등한시했고, 결국 성전은 황폐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것을 도둑질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을 황폐하게 만든 이스라엘을 향해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말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지었기에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십일조의 의무를 등한시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았던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주고 싶으셨으나, 오직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봉헌물을 바침으로 온전히 신실할 때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유명한 “하나님을 시험해보아라!”는 말씀이 말라기서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먼저 말씀을 보겠습니다. 3장 10-12절 입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말 3: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오직 말라기서에 단 한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가 십일조와 봉헌물을 다시 나에게 드려 온전하고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나 안 주나 시험해보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테스트해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이 본문을 보고 어떤 분들은 잘못해석해서 ‘십일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나보다!?’하고 십일조를 마치 증권회사에 투자하듯이,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축복을 받아내야 된다는 듯한 어조로 잘못 해석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어떠한 공식 안에 집어넣고 섬기려 하는 것입니다. 마치 동전을 넣고 스위치를 돌리면 물건이 나오는 문방구 앞에서 설치된 자판기처럼, 하나님을 어떤 특정한 공식 안에 집어넣고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해 복 주시겠지?”하는 식으로 물질과 성공에 대한 우리의 탐심을 교묘하게 신앙이란 이름으로 구색 맞추기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십일조가 복의 통로다’라는 공식을 만들 말씀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십일조 드리면서도 삶 가운데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을 안 지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약성경을 보면 바리새인들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물질만 드리고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정신은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돈 떼먹지 말고 하나님께 다 드리면 내가 복 주겠다!” 이런 원리가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을 담아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믿으며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6) 완악한 말로 주를 대적함 (3장 13장 – 4장 3절)
자,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 논쟁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완악한 말로 나에게 대적하느냐?” (“You have spoken hard, rude words to me.”) 이스라엘이 말합니다. “우리가요?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다고요? 우리는 그런 적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슨 말로 주님을 대적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말하는 것을 내가 다 들었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짓이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죄를 뉘우치며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어? 그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하나님 섬기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헛수고야.’라고 너희가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이렇게 말했지? ‘이제 보니 교만한 사람이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비즈니스 더 잘 되고 번성하네. 하나님이 계시나 안 계시나 시험하는 사람들도 재앙을 받지 않고 잘만 살아가네…’하고 말한 것 내가 다 들었다. 너희가 이처럼 말하는 것이 바로 말로 나를 대적하는 것이다!” 자, 이 논쟁의 내용을 말씀으로 읽겠습니다. “(말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말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앞서 4번째 논쟁은 악인들이 잘 되고 형통함을 보며 불만을 가진 이스라엘과의 논쟁이었고, 마지막 6번째 논쟁은 의인의 고통당함과 자신들의 불행을 보며 불만을 보이는 이스라엘과의 논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와 닿게 바꾸어 표현하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 제가 하나님 하라는 대로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됩니까?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 믿어도 저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에요? 이 모든 것이 헛된 일 아닙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한 번 들어볼까요? “이스라엘아, 나를 잘 섬기는 자를 내가 안다. 내가 유한한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간 자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란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내 앞에 있는 기념책에 다 기록해 놓았단다. 너희 육신의 아버지도 아들이 자기를 잘 섬기면, 그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느냐? 나도 나를 섬기는 자들을 내가 아끼고 사랑할 것이야. 악인과 의인은 분명하게 나눠지는 날이 있을 것이란다. 악인에게는 두렵고 강력한 심판이 임할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있을 것이야!” 자, 바로 이 내용 한 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들어볼까요? 16-17절 말씀입니다. “(말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순종의 순간들을 주님의 기념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일기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아간 하루하루가 잊혀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기장에 전부 기록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주님께서 왜 기록하고 계실까요?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의미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너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악인은 말이야.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용광로 불을 보내어 모든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 태워버릴 것이다.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 내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태울 것이다. 그들의 뿌리와 가지까지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태울 것이다! 악인들은 내가 직접 발로 밟을 것이야! 악인들은 너희들의 신발바닥에 묻어 있는 흙먼지 같겠고, 불 속에서 다 타고 남은 재와 같이 망하게 것이다. 그러나 나 여호와에게 봉사/충성한 너희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으로 치료해 줄 것이야! 온갖 죄와 악을 내가 다 사해주고, 용서해준다!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야” 말라기 3장 18절에서 4장 3절 말씀입니다. “(말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자 이제 말라기의 결론을 맺어봅시다. 말라기는 참으로 우리 현실과 밀접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괴리가 있을 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은 고통 당하는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갈 것인가?’ 6가지 논쟁 중 3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정말 공의로우신 분일까?” 말라기서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이 우리의 기대와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라기의 결론은 주님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자 엘리야가 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온 세상의 공의를 완성하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오심으로 세상은 공의롭게 변화하고 모든 악의 세력은 뿌리 채 뽑혀 불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까지… ‘그날이 오기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라.’ 이것이 말라기의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말라기의 또 다른 별명을 말씀드렸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긴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여전히 또 다시 죄악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여전히 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다시 주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을 향해 달려갑시다. 주를 섬기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이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고 멋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 복된 삶을 날마다 주와 함께 살아가시고, 결국 주 앞에서 서는 날 주님의 기념책에 우리들의 거룩한 행실이 가득 적혀 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고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올려 드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