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9 강력한 자비, 자비로운 믿음 (누가복음 7장 1~17절)


오늘 본문에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이란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로마 장교입니다. 어느 날 백부장이 아끼는 그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손써볼 방도가 없었던 백부장은, 병든 자들을 고치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그와 가까이 지내는 유대인 장로들에게 자기 대신 예수님께 가서 병든 종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꺼립니다. 이에 백부장은 이방인인 자신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유대 장로들을 보내 종의 병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게 된 것이죠. 예수님 앞에 나온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에 대해서 칭찬을 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사랑해주었고, 또 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백부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자, 이번에는 백부장의 벗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백부장의 말을 전했습니다. 백부장의 말을 한 번 들어봅시다. 6-8절입니다. “(눅 7: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눅 7: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고백을 한 번 다른 성경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군대는 철저히 계급사회고 상명하복 즉, 상관이 명하면 하관은 복종하는 집단입니다. 백부장은 이것을 빗대어 자신이 백부장으로서 가진 권세를 통해 아래 사람에게 오라고 하면 그 사람이 오고, 가라고 하면 간다고 한 것이죠.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권세를 통해서 굳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도, 종의 질병에게 떠나가라고 말씀만 하시면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몸에 손을 대어주어야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혹 예수님께서 직접 육성으로 ‘병이 나았다’하시는 음성을 직접 들어야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세는 그보다 뛰어나 직접 환자를 보지 않고도 말씀만 하시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엄청난 믿음 아닙니까? 이에 예수님도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9절을 봅시다.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그 후 예수님의 능력으로 죽을 것 같았던 병세가 사라지고 종은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역사는 공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지금도 그 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병든 몸을 고치시고, 우리 삶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으심을 믿고 있습니까? 백부장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우리 필요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나인’이란 이름의 성으로 가시게 됩니다.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 때마침 성 안에서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장례 행렬이 예수님 쪽을 향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신을 성 밖에 매장하려고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의 무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신을 메고 나오는 비탄과 슬픔에 처한 죽음의 무리가 있는 셈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장례 행렬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장례 행렬을 보니 죽은 자는 나인 성에 사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죽은 자에 대해서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라는 설명을 통해 이 죽은 아들이 그 어머니에게는 삶의 유일한 소망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부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들이 죽었을 때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또한 나인 성에 사는 사람들도 슬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자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처참하게 울고 있는 과부 어머니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곧 그녀에게 가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관 가까이 다가 가셨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본래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시신은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율법에 따르면 시신에 몸이 닿으면 그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신이나 관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관에 손을 대신 예수님은 관에 누워 있는 죽은 아들을 향해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15-16절입니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향하여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말도 했습니다. 주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두려움과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을 때, 그녀의 인생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며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의 삶에 찾아오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 어떤 고통도, 문제도, 아픔도 해결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면, 우리 병든 몸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가 가진 문제도 능히 다 해결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삶을 치유하고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아픔과 눈물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찾아온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까?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간구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찾아와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님께서 능히 우리 모든 아픔들을 고쳐 주시고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크신 은혜 베풀어 주시는 귀한 오늘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