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5 다시 하나님 사랑 앞으로 (말라기 1장 1-5절)

<저자>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저자의 이름은 ‘말라기’이며,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입니다. 구약의 소선지서들은 책을 지은 선지자들의 이름을 따서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성경학자들은 ‘말라기’가 선지자의 이름이 아니라, 말라기서 3장 1절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라는 표현에서 나오는 ‘나의 사자’라는 표현에서 책의 제목을 따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말라기 선지자가 말라기서를 썼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록연대>
말라기는 정확하게 언제 기록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약 주전 430년경 정도에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고, 이 때에 기록한 책으로 보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살아가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지 약 100년이 지난 후 이야기입니다.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격려하여 성전이 완공된 후 약 8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말라기와 동시대 인물들은 학사 에스라와 느헤미야 입니다. 학사 에스라는 주전 458년에 2차 포로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에 3차 포로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는 주전 430년경에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선지자는 동시대에 사역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세 사람이 쓴 책들에는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는 문제, 십일조를 안 드리는 문제, 제사장들의 부패 문제들을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이 세 사람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시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서 4장 6절로 구약성경이 끝난 후, 성경을 한 장만 더 넘기면 마태복음 1장 1장이 나오면서 신약시대가 시작합니다. 성경은 한 장 차이지만, 실제 역사로 보면 말라기와 마태복음에는 약 430년 간의 간격이 있는 셈입니다.

<주요 내용>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삶과 그들의 생활 속 부패를 지적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우상숭배 문제, 이혼 문제, 십일조 문제, 사회정의 실천, 지도계층의 부패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며 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주의 사자 엘리야가 올 것이란 예언으로 책이 마무리됩니다.

<활동 시대 배경>
앞서 시대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벨론 포로로 70년 동안 살다가 성전을 짓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약 100년 후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는 꺼지지 않는 꿈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고국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해주신 메시아의 나라를 세워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이전에 다윗왕국 시대 때 누린 황금기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서 모두에게 공의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꿈을 갖고 약 5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성전 건축도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80년이 지났습니다.
분명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전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부푼 마음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완공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형편이 하나도 좋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다르게 먹고 사는 현실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여전히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습니다. 과거 찬란했던 이스라엘의 영광은 빛 바랜 낡은 흑백사진처럼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이전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의 도래는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고 요원해 보였습니다. 주변 국가들의 괴롭힘으로 현실의 삶은 먹고 살기 팍팍했고, 미래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점점 더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는 낙담이 찾아왔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도 나날이 쌓여갔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마져도 풍전등화처럼 희미하게 꺼져갔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까지도 의심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톱니바퀴 속으로 돌아가, 또 다시 포로 이전의 모습처럼 똑같이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팍팍한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괴리를 느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미지근한 신앙만 남았습니다. 여전히 종교성은 남아 있어서 형식적으로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열정 없이 주일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는 Sunday Christian 들과 비슷합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는 드리지만, 삶의 모습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이 점점 더 죄악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 메시지가 바로 ‘말라기’입니다.

<책의 구조와 형식>
말라기서는 참으로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장 1절은 서론으로써 이 책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경고 메시지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1장 2절부터 4장 3절까지 본론입니다. 본론은 총 6가지의 ‘논쟁’이라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논쟁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두 사람 혹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반박하는 것을 논쟁이라고 합니다. 말라기서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나눈 총 6가지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가지 논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랑한다 말씀하심 (1장 2-5절)
2) 하나님에 대한 멸시 (1장 6절 ~ 2장 9절)
3) 이방여인과의 결혼과 유대인 아내와의 이혼 문제 (2장 10-16절)
4) 이스라엘이 말로 하나님을 괴롭힘 (2장 17절 ~ 3장 5절)
5) 하나님의 소유를 도둑질 함 (3장 6-12절)
6) 완악한 말로 주를 대적함 (3장 13장 ~ 4장 3절)
말라기서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벌어진 여섯 가지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논쟁은 먼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이스라엘이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론에 대해서 응답’하시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으로 4장 4-6절, 세 구절은 말라기의 결론입니다. 결론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주신 언약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실 주의 선지자 엘리야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내용 설명>
자, 이제 본론에 해당하는 말라기 1장 2절부터 4장 3절까지 나와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6가지 논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 (1장 2-5절)
첫째 논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주장으로 시작됩니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반박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다고요? 하나님 지금 우리 사는 꼴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하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함께 살펴봅시다. 1장 2-3절 말씀입니다. “(말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반론을 제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 자손은 미워하시고, 동생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순서로 따지면 장자 에서가 언약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말해줄까? 야곱이 동생이지만, 내가 야곱을 사랑했잖아?!”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 계승자로 삼으신 은혜를 그들에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할 때, 에돔도 같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후 에돔은 계속해서 폐허로 남게 된 반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에돔 사람들도 자기들도 성을 세우려고 해도 하나님이 허물어 버리십니다. 에돔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3-4절입니다. “(말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말 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페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돔과 이스라엘, 똑같이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다시 성전을 짓고 살아났고, 에돔은 지형적으로 천연의 요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메시지들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심장을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슴 깊이 믿고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오늘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며, “아,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힘겨운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시는 것 맞습니까? 내가 하나님 자녀 맞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내 삶이 이처럼 팍팍하고 어렵습니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을 잠시 여기서 멈추어 놓고, 오늘 본문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을 한 번 우리가 대신 변론해 봅시다. 이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 위한 부푼 꿈을 가지고 온 자들입니다. 나름대로 한 때는 불타는 신앙의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이처럼 신앙은 추운 겨울 창 밖에 내놓은 커피처럼 미지근하게 혹은 냉냉하고 차갑게 식어버렸을까요? 현실이 너무 비참한 거에요. 한 마디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든 거에요. 하나님께서 분명 성전 지으면 엄청난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서 통해서 우리도 봤잖아요. 솔로몬 성전 때보다 더 큰 영광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우리도 봤잖아요. 그런데 성전을 지은 지 무려 80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드라마틱한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여전히 인생은 추운 겨울입니다. 기다리면 주시려나…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해가 뜨겠지… 좋은 날이 오겠지… 겠지.. 겠지.. 하고 8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어요.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면 낙심할 만하지 않습니까? 현실과 말씀의 괴리… 이것이야말로 과거 한 때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듯이 뜨겁게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의 신앙이, 한 순간에 냉동고 속 동태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이유 아닙니까? 성전 지으면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식민지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리가 반경 사방으로 약 45km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지역이고, 총 인구가 약 15만명 정도 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적들이 수시로 공격해옵니다.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고 가뭄까지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정말 우리를 사랑하세요?”라고 반문을 던질 만한 상황 아닙니까?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삶으로 한 번 가지고 와 봅시다. 작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열심히 보고,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열심히 마음을 드리며 섬겼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겠지…’ 그런데 몸이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 거에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몸은 더 쇠약해져 갑니다. 지난 한 해 코로나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힘든 거에요.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기도로 매달리며 하나님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힘든 거에요. 나름대로 가정의 이런저런 문제로, 자녀들의 문제로, 개인 신변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살아왔는데 2021년도 지금 내 상황을 보니까 여전히 똑 같은 형편에 놓여 있는 거에요. 마치 자동차 엑셀을 세게 밟았는데도 기어가 Parking에 놓여 있는 것처럼 내 인생이 ‘stuck’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쳇바퀴 위에 올라간 햄스터처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 인생이 한 치도 앞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알잖아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 정도 문제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현실이 더 괴로운 거에요. ‘하나님은 snap of a finger 만으로도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내 인생은 내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일까?’ 성경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말이 교회 전도 슬로건으로는 들리는데, 정작 내 삶의 진심 어린 고백으로 나오지를 않는 거에요. 거울 속 나를 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동의하지 못하는 거죠.
오늘 이 밤에 이 말씀을 함께 듣고 계신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세요?’하고 주님의 사랑이 의심스럽고 믿기 어려운 분은 안 계십니까? 목회자인 저도 힘들고 어려운 때에 들어가면 이런 의심이 듭니다. 제 솔직한 고백이에요. “하나님, 전 여기까지 입니까? 이대로 날 버려 두실 것입니까?”
지난 1997년 한국에서 IMF 터졌을 때 기억나십니까? 명예퇴직이다, 정리해고다 해서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었죠. 밝은 대낮에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방황하는 40-50대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명예퇴직한 어느 50대 은행지점장은 자살해서 강남구 논현동 아파트에서 싸늘한 변사체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매일 같이 소주 3-5병 마시고 어디 가서 서러워서 말도 못했어요. 면접을 보러 가도 더 이상 나이가 어중간 해서 나를 써줄 곳이 없는 거에요. 내 마음은 열정이 넘치고 무슨 일이라도 시켜주면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고 자부하는데, 사람들은 이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치부하고, 나를 거부하니 얼마나 처량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때 대낮부터 교회 문을 두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까? 참 큰 위기였습니다. 그래도 그 위기를 잘 지나갔습니다.
IMF 후, 약 23년이 지났습니다. 그 때 40-50대가 지금은 60-70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65세 되면 다 노인이고 은퇴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퇴직 후 빈곤에 허덕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이 노인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참고로 노인 자살률도 한국이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40-50대는 IMF, 60-70대에는 코로나…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까요? 요즘 한국의 별명이 있습니다. ‘노인이 가난한 상태로 오래 살게 되는 나라’ 현재 한국인 평균 수명이 82.1세입니다. 정년퇴직시기는 53세에요. 퇴직 후 약 30년 동안 직장 없는 노후를 맞이합니다. 몸은 아프고 허리도 무릎도 아프고 힘은 빠지는데 주머니에 돈은 없고, 먹고 살기는 더 힘들어지고 삶이 너무 비참한 거죠. 제가 지금 노년층을 예로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사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것은 모든 세대가 다 똑같습니다.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며 묵상해 봤습니다. 제 주변에도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 열심히 붙잡고 살아가려고 했는데,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서 깨지지 않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삶이 이러하니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정말 계십니까? 계시다면 나를 정말 사랑하십니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분들의 마음도 이해되지 않습니까? 낡은 옷장 서랍 깊은 한 곳에 처박혀 있는 옷처럼 도무지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찾으시지 않을 것 같은 버림 당한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묵상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어요. 제 주변에는 너무나도 몸도 아프고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그 고통의 터널 속에서도 추운 겨울 속 피어나는 매화처럼 아름답게 믿음의 꽃을 피워가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오늘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어요?”라고 질문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에서는 야곱의 형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단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 기준으로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같이 남들이 볼 때 변변치 않고, 자랑할만한 것 하나 없고, 내 자신이 봐도 너무나도 초라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거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야곱이 어느 날 자기 아들 요셉의 손에 이끌려 이집트의 왕 파라오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파라오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요?”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분명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도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누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아들 요셉을 떠올려 보십시오.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가서 무려 11년 동안 하류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후에도 2년 동안 지하감옥에서 죄수로 살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누가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보며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하겠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심장을 내어줄만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억울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서 끊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오늘 이 밤,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의 모든 마음을 다 내려놓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귀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