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4 예수님이 여신 새 시대 (누가복음 5장 27~39절)


어느 시대나 사회적으로 비판 받고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직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비판 받는 직종에서 종사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자신도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까 그들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라는 직업이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민족을 버린 배신자로 취급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시대 일본의 앞잡이 같은 존재로 본 것이죠.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야 했고, 이 일을 세리들이 담당했습니다. 안 그래도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인데 세리들이 세금까지 거둬가니 얼마나 미웠을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등에 업고,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세리들은 살인자, 도둑, 창녀처럼 죄인 중의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세리 레위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5: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아마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실 때 주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운영위원회를 뽑아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 얼마나 반대가 많겠습니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인 레위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레위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세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 생각하며 저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기피 했어도,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레위가 앉아 있는 세관에 찾아오셔서 그에게 자신을 따르라 초청해 주셨습니다. 세리 레위가 한 걸음에 예수님을 따라 간 것을 보면 그도 예수님을 진작부터 따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이 죄인이기에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은 자를 가까이 두실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제자로 삼아 달라고 찾아갔다가 그 분께 외면당하고 정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욕하고 질타하는 세리 레위가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제자가 되도록 그를 초청해 주시고 직접 불러 주셨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죄인이요, 매국노요, 민족의 배신자라 낙인 찍힌 세리인 자신을 제자로 불러 주셨으니 레위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곧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자기 직장 동료들, 즉 다른 세리들과 가까운 지인들을 많이 초청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자리를 함께하는 예수님을 보고 혀를 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리들을 죄인 취급하며 그들과 절대로 식사하지 않았고, 상종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어울리시는 모습을 보고 비방했습니다. 30절입니다. “(눅 5: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당시 세리들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부류의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있느냐?’하는 물음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기 위해서 이처럼 물어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한 번 들어봅시다. 31-32절입니다.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고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구원자를 기다리던 세리와 같은 죄인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와 죄인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비난합니다. 이번에는 경건한 자들처럼 금식하지 않고, 세리들과 잔치를 벌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흉잡으려 했습니다. 33절입니다. “(눅 5: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싫어했으면, 그가 잔치에서 먹고 마신다는 이유만으로 경건치 못한 자로 취급하고 있을까요? 사실 바리새인들도 잔치에 초대받으면 가서 먹고 오건만, 유독 여기서 잔치에 초대받아 식사하고 계신 예수님만 마치 죄인 된 것처럼 정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요구하는 금식은 대속죄일의 금식 뿐입니다. 이외에는 모든 금식은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처럼 금식하지 않으신다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직 금식할 때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어찌 금식하겠습니까? 좋은 날에는 함께 먹고 마시고 기뻐해야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고, 그 날에는 비로서 금식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후 계속해서 장로들의 유전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36-39절입니다. “(눅 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눅 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눅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 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새로운 천조각을 빨래하면 수축되며 주변의 옷을 잡아당기게 됩니다. 따라서 낡은 옷에 구멍이 났을 때 새 옷 조각을 대지 않습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발효되면서 가스를 냅니다. 이로 인해 포도주를 담은 가죽 부대는 팽창하게 됩니다. 발효하지 않은 새로운 포도주를 이미 팽창해 버린 옛 가죽 부대에 넣게 되면, 탄력을 잃어 터지게 됩니다. 따라서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신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옛 유대교의 규례들과 공존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없는 종교적 의식과 규례들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과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도 품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도록 새로운 소망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세리 레위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도무지 하나님 나라 자녀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지 못한 죄 많은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친히 우리들을 주님의 친구라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주님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받은 구속의 은혜는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 레위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이웃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