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5 골로새서 시리즈 (9) 새 사람으로 옷 입으라 (골로새서 3장 12-14절)

서론. 우리 영혼은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첫걸음 중 적재적소에 맞게 옷을 입는 법을 배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장례식과 같이 엄숙한 장소에서 옷을 알맞게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도 한국 장례 문화와 비슷해서 장례식 때 흰 옷이나 밝은 계열의 옷 보다는 어두운 검은색 계열의 옷을 입습니다. 미국이야 장례식 때 신발을 벗을 일이 없지만, 한국에서는 장례식장에 가면 대부분 구두를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말을 잘 신고가야 합니다. 이따금씩 사회 초년생의 경우, 위의 옷은 검은색으로 잘 입었는데, 하얀색 양말을 신고 오는 일들도 있습니다. 장례식 때 가능하면 하얀 색의 밝은 옷을 피해야 하는 것처럼, 가능하면 양말도 어두운 색을 신는 것이 하나의 예의입니다. ‘뭐 양말 색깔 하나 가지고 그렇게 대수롭게 따져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장례를 치르고 있는 유족들을 향한 ‘예의’고 ‘예절’입니다.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현재 목회하고 계시는 류응렬 목사님은 제가 신학교 시절에 설교학을 가르쳐 주신 저의 ‘은사님’이십니다. 당시 교수님이셨던 목사님께서 저의 설교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도사님 설교 참 잘하셨습니다. 전도사님은 혹시 이민 목회할 생각 없습니까? 이민 목회하면 잘 하실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 제가 한 가지만 부탁합니다. 가능하면 강대상 올라갈 때는 정장 윗 단추를 꼭 잠그고 올라가세요.” 목사님은 설교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님들에 대한 예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가르침이 생각나 언제나 강단에 오를 때면 정장 단추를 꼭 잠그고 올라갑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첫걸음 중 적재적소에 맞게 옷을 입는 법을 배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신앙생활을 하며 옛 사람의 옷을 버리고, 새 사람의 옷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 우리가 벗어버려야 하는 옛 사람의 성품들과 행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새 사람이 입어야 하는 성품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본론1. 성도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성품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하는 5가지 성품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 말씀을 봅시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여기 보니 다섯가지 성품이 나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들로 옷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섯가지 성품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함께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옷 입어야 하는 첫 번째 성품은, ‘긍휼’입니다. 긍휼이란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긍휼을 다른 말로 바꾸면 ‘동정심’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정심’, 말 그대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일인 것처럼 마음이 같이 움직입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사람들이 ‘공감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신음하고 아파하고 있는데도, 다른 한쪽에선 귀를 막고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습니다. 긍휼의 반대말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사용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이웃들에게 주는 관심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1일 수요일 전 세계 동영상 플렛폼 1위 유튜브가 저녁 7시부터 약 2시간 정도 다운되었습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이용자들이 동시에 접속 장애를 일으켜 불편을 겪게 되었습니다. 즉각적으로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유튜브가 먹통이 되었다. 동영상 재생이 안된다.”는 글을 수십만 건 이상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미국에서 사용하는 트위터 계정만 계산해 봐도 “Is Youtube down?”이란 글이 무려 28만건이 넘게 올라왔습니다. 유튜브에 접속하는 월 평균인원이 2 billion, 약 20억명 이상 됩니다. 하루에 전 세계 사람들이 유튜브 시청하는 시간이 평균 1 billion hour, 약 10억 시간 이상 됩니다. 전 세계 인구가 엄청난 시간을 동영상 시청에 쏟고 있는 것이죠.
한 통계자료를 보니, 한국 사람의 경우 하루 동영상 평균 시청 시간이 1시간 38분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 자료를 보면 동시에 사람들이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눈에 뛰게 급감했습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쏟는 시간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들이 가상의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증가할수록, 그에 비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가족이나 친지들과 이웃들에 대한 관심 또한 눈에 뛰게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변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관심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관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 주변에 있는 힘들고 어려운 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이 말씀은 우리의 생활이 이웃들과 함께하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즐거울 때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힘들고 어려운 때도 함께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긍휼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구제’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가난한 이웃들, 소외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관심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베품으로 돕고 섬기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배고픈 사람에게는 “기도해줄께”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야합니다. 추운 겨울 옷이 없어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 함께 읽자”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옷을 주어야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경우, “집사님 같이 기도할께요.”라는 말로 모든 긍휼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신앙생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희생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사랑, 눈에 보이는 사랑, 손에 잡히는 사랑을 하십시오. 진짜 기도해주는 사람은 오히려 기도하겠다고 말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기도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은 어려운 이웃을 볼 때 마음이 같이 아프고 움직이는 긍휼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긍휼의 마음을 실천하는 구제로까지 이어지길 바랍니다.

2) 우리가 옷 입어야 하는 두 번째 성품은, ‘자비’입니다. 자비란 타인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외로 교회 다니는 분 중에 언행이 거친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 보는 것 같아도 우리들을 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례하면 누가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이 싫어서 또는 예수님이 싫어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 안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무례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또 사귐이 있을 때 친절하게 대하는 것 즉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자비입니다.
수년 전 [신앙계]에 실린 내용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어느 여 집사님이 오래간만에 주말에 목욕탕에 갔습니다. 지금이야 샤워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덜 합니다만. 예전에는 공중목욕탕에 물을 담아두는 바가지가 있었죠. 주말이라 목욕탕에 사람이 많아서 이 여집사님이 쓸 바가지가 없는 거에요. 이리저리 둘러보니까 저만치 앞에 중년의 한 아주머니가 바가지를 두 개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서 “저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바가지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제가 한 개를 사용해도 될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주머니가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는 말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거 안보여!”하고 신경질을 내더래요.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씻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새로 목욕탕 안에 들어온 손님이 아까 그 아주머니를 향해 부르는 말을 듣고 이 여 집사님이 깜짝 놀랐대요. “아니 권사님! 여기 웬일이세요! 기도원 다녀오셨다면서요?” “아이고, 말도 마! 집회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은혜가 폭포수처럼 내리더라고.”
과연 이 권사님이 받은 은혜는 무슨 은혜일까요? 은혜를 받긴 받은 걸까요?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성품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분의 친절한 사랑을 닮아갑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화를 내고 막 함부로 대하고 있다면, 아직 갈 길이 먼 사람입니다. 경건이란, 얼마나 기도를 오래하고 얼마나 성경 많이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에게 친절한 삶을 사는 것이 진짜 경건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3) 우리가 옷 입어야 하는 세 번째 성품은,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면 교만으로 우쭐대지 않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처럼, 신앙생활도 익어갈수록 겸손함이 더해갑니다. 속이 꽉 찬 벼일수록 무게로 인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듯이, 그 사람의 내면이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을수록 겸손해집니다.
4) 우리가 옷 입어야 하는 네 번째 성품은, ‘온유’입니다. 우리는 온유하면 연약한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란, 힘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폭하고 힘이 센 야생마를 한 번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누군가 그 말 위에 올라타려고 하면 난리법석을 떨며 사람을 내동댕이 칩니다. 그러던 중 아주 뛰어난 마부 한 사람이 이 야생마를 맡아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기나긴 훈련을 통해 드디어 마부의 말을 잘 듣는 상태로 성격이 변화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온유’입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이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세의 삶을 보면 그가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젊은 날, 이집트 감독관이 자신의 동족 히브리인을 괴롭히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 그 이집트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젊은 모세에게는 힘이 있었고, 그는 이러한 방식이 자기 나름대로 그것이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무려 40년 동안 야생마 같은 모세를 광야에서 양치기로 지내게 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모세의 불 같은 성질을 깎고 또 다듬어 가셨습니다.
온유란, 성숙한 자가 자기 이웃의 무례함과 거친 태도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고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전에 예수 믿기 전 같으면 입에서 거친 욕이 나가거나, 아니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믿고 나서 성질이 깎이고 깎여서 내 성질과 생각을 내려놓고 그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예수 믿고도 아직 다혈질인 분이 계실 겁니다. 이따금씩 마음에 분노가 ‘욱’ 올라오면, 야생마처럼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자라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란, 나약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힘 있는 자가 자신의 힘을 컨트롤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양과 같이 온유함을 보이셨습니다.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온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불 같은 성질과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온유하신 예수님을 닮아가시길 바랍니다.

5) 우리가 옷 입어야 하는 다섯 번째 성품은, ‘오래참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서로 상처 주고 또 상처받으며 삽니다. 서로 너무나 사랑해서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도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살아갑니다.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 자매끼리도 싸우고 다툽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싸우고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곤 합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과 죄인이 만나면 불협화음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정말 많은 상처들을 받습니다. 내 뒤에서 나를 흉보는 사람, 나에 대하여 험담하고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 학벌이 좀 높다고, 나보다 좋은 직장 다닌다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 힘겹게 조금 조금씩 모아온 돈을 큰 맘 믿고 빌려줬더니 막상 돈 받고 나니까 모르는 척하는 사람, 하도 간절히 부탁해서 보증을 서주었더니 사업 망하고 자취를 감춘 사람, 그 사람 때문에 보증 선 사람은 가족과 함께 살던 집도 나와야 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우리 맘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이런 상처받으면 마음 속에서 분노가 솟구칩니다. 당장이라도 가서 그 사람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죠. 억울한 일 좀 안 당하면 좋겠는데 교회 다니는 성도님들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아니, 오히려 가만히 보면 교회 열심히 다니는 분들이 억울한 일을 더 많이 당하는 거 같아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일해도 사람들 사이에서 괜한 오해만 사고 억울한 일만 당할 때가 많습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 늦은 밤 나를 잠 못 자게 하는 사람, 분통이 나고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 우리 가슴 속에도 혹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도 ‘오래 참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이고, 목사님 말은 쉽죠. 한 번 내 입장 되보소. 얼마나 억울한데요. 그게 쉽게 됩니까?” 저 역시 그 말에 100% 찬성합니다. 어떻게 이런 오래참음이 사람의 의지로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사랑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할 수 없습니다. 오래참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그 안에 있는 사람만이 내 이웃을 향해서 또한 심지어 내 원수를 향해서도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오래참음의 성품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사랑하기 힘들어도 그래도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밥 달라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졸립다고 시도 떼도 없이 웁니다. 부모는 밤에 잠도 못 잡니다. 그럼 엄마가 처음에는 아기를 사랑하니까 기쁨으로 해줄 수 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엄마도 조금씩 지칩니다. 엄마도 조용한 곳에서 자고 싶어요. 그러나 아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합니다. 고요한 밤 이제 좀 잠들었나 싶어 새우잠이라도 청하려고 잠깐 눈 붙이면 아기가 언제 그랬냐는 둥 또 고래고래 울어댑니다. 감정적으로 엄마도 쉬고 싶고 자고 싶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여전히 무거운 몸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아기 밥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또 안아주고 재워주는 게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으로 하는 거에요. 내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그 감정을 이겨내서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가족 중에 혹은 직장 중에 교회 내에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내 마음을 화나게 하고, 막 흔들어 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 감정은 그 사람에게 화내고 싶고 한대 쥐어박고 싶지만 어떻게 해요? 그래도 그래도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거죠. 우리 옆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해 봅시다. “집사님, 그래도 사랑합니다.”
세상은 오래 참는 사람을 보고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오래 참는 것’은 연약함의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성숙함의 표지가 됩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사랑하기를 쉽게 포기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오래참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면이 예수 그리스도로 굳건한 사람만이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화를 돋구는 사람들에게 참을성을 보이고 인내하는 것은 강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보복할 권리가 있지만 성급하게 보복하지 않고 자기를 억제하는 일은 성숙한 사람만이 가능한비다.
다윗이 사울 보다 약해서 참았습니까? 아니죠,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에요.” 다윗이 사울보다 강하니까, 사울이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그래도 다윗은 사울을 오래 참아주는 거죠. 지금 당장은 참는 쪽이 억울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믿음을 가지고 보면 오래참음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오래참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들 마음에도 예수님처럼 ‘지치지 않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2. 성도가 취해야 할 새 사람의 태도
자,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으로 취해야 할 삶의 자세 2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라
첫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라 권면합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3절을 보면,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혐의’란 단어는 ‘비난’이란 말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내가 비난할만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긴 것이죠. 죄인과 죄인이 만나면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불평이 있고 불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 우리 성도들은 신앙의 시험대 위에 올라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는가?’하는 테스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옵션은 크게 3가지입니다. 1번: 피한다. 갈등이 있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피하는 거에요. 그 사람이 없는 듯 무시하고 말도 걸지 않습니다.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죠. 2번: 싸운다. 내 속의 불평과 불만을 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 사람의 부당함을 밝힙니다. 비록 그로 인해 이 사람과 골이 더 깊어진다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내 마음 속 주장들을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3번: 용납하고 용서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용납이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관용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대로 바꾸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생각, 가치관이 다르지만 그 다름을 받아주고 곁에서 ‘견뎌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용서란 단어는 ‘빚을 면제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분명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맞지만, 그 사람에게 빚을 면제해주듯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잘못을 용서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용납의 태도를 가지는 공동체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용납과 용서의 근거는 우리에게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에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자신을 해하던 군병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동일하게 반복하여 죄를 범하고 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참으시되 끝까지 참으시고 우리가 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무슨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용서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성도들 역시 마땅히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오에 찬 반목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교회 생활 가운데 서로에게 생겨날 수 있는 이러한 불평거리를 이해하고 용납하라고 권면합니다. 스데반 집사 기억하는가?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삶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랑을 실천하라
둘째로,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상대를 용서하는 자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라 권면합니다. 앞서서 12절에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으로 옷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으로 띠를 매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입는 옷들의 경우, 대부분 옷을 입은 후 단추를 채우거나 자크(zipper)를 올려 옷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한 번 머리속으로 한 번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복에는 단추나 자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복의 경우 저고리, 치마, 바지를 입으면 끈으로 고정합니다. 그래서 한복입을 때 우리가 끈으로 옷을 고정하는 것을 ‘고름맨다’고 합니다.
만일 한복 저고리를 입었지만, 끈으로 묵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유도선수들 올림픽 경기에서 묵고 있는 띠가 풀리면 옷이 풀어헤쳐지는 것처럼 한복도 옷 모양새가 망가집니다. 옷의 기능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합니다. 평상시 활동하기도 불편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도의 삶에 사랑이 없으면 다른 성품들이 하나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입던 옷도 한복과 마찬가지로 끈으로 고정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으로 옷 입고 마지막에는 사랑으로 단단히 그 옷을 ‘고름 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긍휼, 자비를 위선적으로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얼마든지 겸손하고 온유한 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아무런 유익도 없고, 덕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로 인해 넘쳐나는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은 인격을 소유하게 되며 온전히 예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새 사람으로 옷 입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이란 글자가 복음으로 다듬어지면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이제 새 사람의 신분에 맞는 성품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으로 옷을 입으십시오.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사랑으로 띠를 매십시오.
주의 자녀로서, 우리 곁에 있는 가족과 형제자매들과 교회와 이웃들을 더욱 더 사랑함으로써 새 사람으로 옷 입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아름답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