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8 골로새서 시리즈 (8)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골로새서 3장 5-10절)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 3: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서론. ‘영혼’, 잘 관리하고 계십니까?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이 다가올수록 뚝배기에 담긴 따뜻한 사골 국물이 생각납니다. 진한 사골로 우려낸 육수로 담은 설렁탕 한그릇은 얼마나 맛있습니까? 음식을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단하게 돈을 주고 사 먹는 설렁탕 한 그릇일지 모르지만, 음식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골을 우려내기 위해서 깊은 정성이 들어갑니다. 사골을 끓이면 하얀 기름이 둥둥 뜹니다. 그 기름을 제거할수록 국물 맛이 깔끔하고 단백 합니다. 전국에 소문난 갈비탕 가게, 유명한 설렁탕 맛집들의 특징은 바로 이 기름을 장시간 정성껏 제거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성도의 생활 속에 둥둥 떠 있는 죄를 제거하면 할수록 신앙생활이 담백해집니다. 신앙생활이 담백해진다는 말은 하나님 섬기는 삶이 즐거워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삶에 풍성한 만족과 행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죄를 제거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곰탕을 먹을 때 느끼는 맛처럼 어딘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본래 이렇게 맛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담백한, 삶에 풍성한 만족과 참된 기쁨을 가져주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사람의 마음은 우상공장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끊임없이 죄를 만듭니다. 그래서 일정한 기간이 되면 손톱을 자르고, 발톱을 깎아내야 하듯이, 우리들도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를 날마다 깎아내고, 잘라버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가 끊어내야 하는 죄의 두가지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은 ‘옛 사람의 죄 된 성품’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저지르는 ‘옛 사람의 죄 된 행위’ 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거할수록 우리 신앙은 담백해지고 참 된 기쁨과 풍성한 삶이 찾아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우리가 제거해야 하는 두 가지 죄의 모습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 성도가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성품들

1)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첫째로, 성도는 옛 사람의 성품들을 죽여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에 총 5개의 죄가 등장합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입니다. 이 다섯가지를 각각 따로 보지 않고, 먼저 탐심이란 죄부터 봅시다. 나머지 4개가 탐심에서부터 비롯된 죄들입니다. 탐심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를 가리킵니다. 바로 이 탐심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됩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다른 것을 탐하는 탐심은 그야말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됩니다. 성경은 탐심이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탐심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갈망하는 것이 우상의 정의입니다. 따라서 탐심이란, 우리가 하나님 보다 다른 그 누군가를 혹 다른 그 무언가를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단순히 ‘더 잘 살기 위해서’ 아니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와 같이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탐심은 크게 다섯가지 방향으로 표출됩니다. ‘돈에 대한 탐심’, ‘성에 대한 탐심’, ‘권력에 대한 탐심’, ‘쾌락에 대한 탐심’, ‘명예에 대한 탐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이 하나님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악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낙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큰 우상으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탐심들이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위치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가 됩니다.

① ‘음란’과 ‘악한 정욕’은 ‘성에 대한 탐심’에서 비롯됨
오늘 본문 5절에 나오는 다른 죄악들은 다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5절에 나와 있는 ‘음란’과 ‘악한 정욕’은, ‘성에 대한 탐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부일처제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있는 탐심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혼한 배우자 외에도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의 성적인 죄악을 탐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의 성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악하고 수치스러운 일들도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한국의 한 신문사에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 제목은 얼마 전 한국에서 방영했던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에서 유부남이 자신의 아내에게 불륜사실을 들키고자 아내에게 소리친 대사입니다. TV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욕을 내뱉고, 그렇게 욕을 많이 먹은 드라마이지만 시청률이 20%가 넘었습니다. 바람을 핀 남자 주인공이 말합니다. “우리 불륜은 바람이 아니고 사랑이다!” 이 대사 하나만 봐도 이 시대의 근저에 깔려 있는 무너진 성인식에 대한 것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드라마나 문학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과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이처럼 불륜에 대한 드라마가 한참 한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을 당시 한 리서치 기관에서 한국 사람들이 ‘불륜을 어떻게 이해할까?’라는 주제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총 성인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불륜을 한 적이 있다’가 전체 응답자 중에 30%가 넘게 나왔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가정들이 ‘성에 대한 탐심’으로 인해 무너졌음을 이미 듣고 보았습니다. 이제는 불륜이나 잘못된 성관계에서 비롯된 범죄의 소식을 들어도 너무 흔하게 일어나서 이러한 소식들을 들어도 사람들은 이전만큼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음란과 악한 정욕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바로 이러한 성에 대한 탐심을 죽여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 위치한 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시던 지금은 은퇴하신 이재철 목사님이 앞으로 하루는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니 자신의 교회를 다니고 있는 어느 장로님의 아내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부부는 서울에 다른 교회를 대를 이어 신앙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암에 걸리게 되었고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자, 남편 장로님이 이혼을 요구하면서 아예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얼마 전 남편이 동거녀와 함께 이재철 목사님께서 사역하고 계신 백주년기념교회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죠. 이 편지를 받은 이재철 목사님이 이 장로님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주일예배 시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장로님은 지금 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장로님은 누구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의 종 입니까…?” 그리고 또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우리 마음 속 탐심을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 죽이지 않으면, 탐심이 우리를 잡아먹게 됩니다. 탐심의 노예가 됩니다. 저도 우리 코너스톤교회 성도님들께 동일한 질문을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의 종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인 삼고 살아가는 성도가 반드시 음란과 악한 정욕, 즉 성에 대한 탐심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② ‘부정’과 ‘사욕’은 ‘돈에 대한 탐심’에서 비롯됨
5절에 나오는 ‘부정’과 ‘사욕’은 ‘돈에 대한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정’이란 정결하지 못한 마음을, ‘사욕’은 지나친 욕구를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보다 더 큽니다. 돈이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들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돈이 더 많으면 좀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고, 돈을 더 가지면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면 다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은 밤낮으로 ‘돈, 돈, 돈’하고 살아갑니다. 사실 이처럼 돈을 경배하고 돈을 우선시하고 살아가는 태도는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가치관이다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지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다면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자가 되려고 하나님 믿는 분들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디모데전서에 의하면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성도는, 이미 시험에 빠진 자요, 세상이 펼쳐 놓은 함정에 걸린 자요, 어리석고 해로운 죄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간절히 믿는 것이 ‘믿음 좋은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말 그대로 착각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탐심입니다. 자신의 탐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오해해 왔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다 돈 잘 벌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믿는다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 중에는 부자도 있고, 중산층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어느 형편에 처해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신 재물이 많든 적든 그것에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탐심인 부정과 사욕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돈 없이 삽니까? 우리 자식들 학자금 내줄 돈은 있어야죠. 내 아들 결혼식 때 보태 줄 돈은 있어야죠. 내 딸 시집갈 때 결혼 지참금이라도 손에 쥐어주어야죠. 사랑하는 손자들 집에 놀러 오면 5불, 10불 용돈이라도 챙겨 줘야죠. 제가 뭐 저 쓰려고 욕심부리는 줄 아십니까? 제가 이렇게 돈, 돈, 돈 하는 것도 다 가족들 위해서, 다 자식들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돈을 벌려고 그렇게 악착 같이 사는 사람 중에 성질이 고약하고 나쁜 사람만 있는 거은 아니에요. 정말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분들도 많이 있어요. 자식들 조금이라도 좋은 거 먹이려고, 우리 자식들 기죽지 않고 좋은 교육환경에서 살수 있게 하려고 사는 거지, 그렇게 악착같이 돈 모아서 수전노 되거나 반대로 흥청망청 부어라 마셔라 하려고 사는 분은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런 말씀 들어도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죄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일 거에요. 왜요? 자기 나름대로 돈을 사랑해야만 하는 분명한 명분, 선해 보이는 명분이 있거든요. 가족을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돈 벌어야 하거든요.
그러나 디모데후서 6장 10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말씀을 쉬운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돈을 더 많이 얻으려다가 진실한 믿음에서 떠나고, 오히려 더 큰 근심과 고통만 당하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얻으려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믿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그런 자들의 삶에는 더 많은 재물을 갖지 못한 후회와 근심, 그리고 고통만 남게 됩니다. 세상을 사는데 돈은 필요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갖고 더 많은 재물을 쌓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재물에 대한 탐심과 관란하여 가장 확실한 말씀은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한 번뿐인 인생, 재물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을 미워하든가, 아니면 재물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든가 둘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지, 둘 다 고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이런 돈에 대한 탐심인 부정과 사욕을 죽여버리라고 했습니다. 강한 어조입니다만, 그만큼 우리 안에 자리잡은 우상들을 과감하게 산산조각 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된 우리가 옛 사람의 본성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탐심 곧 우상숭배를 죽이라고 했고 성에 대한 탐심인 ‘음란과 악한 정욕’, 돈에 대한 탐심인 ‘부정과 사욕’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2)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는 경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이와 같이 바울이 땅에 있는 지체 즉 우리 속에 있는 탐심의 죄를 죽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 지체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게 되면, 그에 대한 벌과 심판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골 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 했습니다. 탐심을 제거하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에 우상을 모셔 두고 그것에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따라서 탐심을 제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탐심을 제거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 알기 전에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전에 살아가던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말씀 듣지 않으면 크게 혼난다는 말입니다.

본론 2. 성도가 버려야 할 옛 사람의 행위들

1) 죄악의 행실을 벗어버리라
첫째로, 성도가 옛 사람의 성품인 ‘탐심’을 죽여야 합니다. 이어서 둘째로, 성도는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8-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여기에 성도가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의 행위들이 총 5가지가 등장합니다. “① 분노 ② 악의 ③ 훼방 ④ 부끄러운 말 ⑤ 거짓말” 입니다.
‘분노’는 상대방을 향한 지속적인 증오의 상태입니다. 상대방이 너무 미운 거에요. 저 사람을 한 대 때려주고 싶고, 저 사람이 길을 가다 넘어졌으면 좋겠고, 저 사람 사업이 망했으면 좋겠고 하는 그런 강한 미움입니다. 분노를 벗어버리라는 말씀은, 이처럼 상대방을 향한 미움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악의’는 분노가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의도입니다. 상대방에게 해악을 가하려고 저지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너, 기다려. 내가 가만 안 둘꺼야! 내가 너 언젠가 반드시 갚아준다!” 이처럼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 우리를 속이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억울한 상황에 처하게 하고, 심지어 우리의 친절까지도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는지 마태복음 5장 38-44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져주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예. 테니스-윔블던 / 골프-PGA) 예수님 믿고 나서 한 가지 변화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상대방 이기려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져도 되요. 우리는 어차피 승리한 인생이거든요. 그래서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져줄 수 있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져줄 수 있는 믿음의 여유, 사랑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훼방’은 상대방 뒤에서 욕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 험담하고, 거짓 소문을 통해 그 사람의 명예를 해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하지말라는 말씀입니다.
‘입의 부끄러운 말’은, 음담패설이나 비속어, 욕설 같이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 하지 말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남편 성도님들 주의하십시오. ‘신체적 폭력’만 폭력이 아닙니다. ‘언어 폭력’도 폭력입니다. 내가 아내에게 주먹은 안 휘둘렀을지 몰라도, 내 혀로 아내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힐 수 있어요. 혹시 주변에 평상시 기도 열심히 하시는데 입이 거친 분 계십니까?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욕하는 분 계세요?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그 분의 경건은 헛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 봅시다. “(약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너무나도 쉽게 말로 다른 사람 상처주는 사람은 절대로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따금씩 교회 성도분들 보면 새벽예배도 안 빠질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사람들이 왠지 잘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분들이 있어요. 십중팔구 보면 그 분의 말이 거칠어요. 자꾸 사람 자존심 긁고 무시합니다. 대화가 전반적으로 자기 중심적이에요. 누가 다가가겠습니까?
경건한 사람일수록 자기 말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합니다. 어떤 분들은 밖에서는 참 인자한데, 집에 가서는 가족들한태는 욕하는 분들 있어요. 위선자에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신앙생활 하는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는 위선자입니다. 그러니까 일관되지 못한 거에요. 그들의 경건은 거짓이고 헛것입니다.
‘거짓말’은 말 그대로 속이는 말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하나님이 싫어하세요.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주의해야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 사실을 축소하거나 거대포장 하는 것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실된 언어습관을 가져야합니다.

결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으면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새 사람은 누구입니까? 옛 사람의 성품을 죽이고,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린 자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제거하십시오.
갈비탕, 설렁탕 한 그릇을 팔아도, 맑고 단백한 육수를 내기 위해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12시간 이상 기름을 제거합니다. 세상에 음식을 파는 사람도 이런 이 정도 정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열심으로 죄를 제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옛 사람의 성품인 탐심을 죽이십시오.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만족과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