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1 골로새서 시리즈 (7) 위의 것을 추구하라 (골로새서 3장 1-4절)

    서론.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는가?

목회자로서 제가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에게 자주 점검하고 싶은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바로 ‘구원’입니다. “집사님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근거가 정말로 성경적이고 바른 것인지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전히 비성경적이고 옳지 않은 근거를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잘못 믿는 분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은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자신의 부모가 아버지가 장로님 혹은 안수집사님이고, 어머님은 독실한 권사님 혹은 집사님이며 자신도 웬만해서는 교회에 빠지지 않고 교회봉사도 열심히하고 십일조도 빠트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복음을 교육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문을 따라 읽었고, 그에 따라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영리로 전도하는 분들이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여기 있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영접기도문을 따라 읽어서 마치 주문을 외듯이 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수용이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영접기도문을 잘 따라 읽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신이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았고, 여러가지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세례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지식이 많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교회 훈련 프로그램을 수료했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폭발프로그램에서 훈련 받아 보신 분들은 다음의 질문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선생님, 만일 오늘밤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죽음이 온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Yes”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만 있다면, 다른 말로 하면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그 사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오해하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구원받았음이 확실하다고 믿는 그 사람의 신념이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근거에서 비롯된 확신이라면 그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를 나의 주인이요, 그리스도로 진실되이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진심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예수님께 반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과 인간과 나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 나의 주인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인되심을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며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해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 내 영혼의 구원자로 모셔 들이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 곧 영원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든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리켜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참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는 이 복음에 대하여 ‘우리의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자신의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자주 물어본 질문을 여러분에게 소개한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Now, are you ready to say that you are a Christian?”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만약 여전히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주저하며, “난 아직 그리스도인이라 하기엔 부족해… 아직도 내 삶은 그리스도인이라 하기엔 부끄럽지”라고 대답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여부는 우리의 선함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기에 충분히 선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충분히 선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만 이는 사실 악마의 거짓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기에 충분히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은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들의 핵심은 “내가 충분히 선해야 구원받는다” 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다릅니다. ‘내가 충분히 선해야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은 “오직 주님만이 충분히 선하시며,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질문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구원의 근거를 어디서 찾고 계십니까? 구원의 근거를 우리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선한행위, 열심,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부터 나를 구원한 구원자요, 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진실한 믿음의 고백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본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선행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 믿음은 믿음만 남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 삶의 선행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요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즉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주제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대한 설교를 계속해서 이어 가기 전, 잠시 여기서 성경을 읽는 중요한 관점을 하나 배우고 가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성도가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이 살아가야하는 새로운 삶의 태도와 자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바울이 쓴 서신서들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서신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처음 파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파트에서는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역시 이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첫 번째 파트가 끝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두 번째 파트의 시작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러므로’란 접속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 예를 들어봅시다. 로마서의 경우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야기하고, 12장부터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12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함께 봅시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의 수많은 구절(총 433구절) 가운데 12장 1절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모습을 명령하는 첫 번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찾아봅시다. 바울이 쓴 에베소서의 경우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도 크게 두 파트로 나뉩니다. 에베소서 1-3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야기하고 4-6장까지는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을 봅시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기도 보니까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특징입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복음을, 두 번째 파트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의 새로운 삶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자, 이제 다시 골로새서로 돌아옵시다. 골로새서도 바울이 쓴 편지이기에 동일한 패턴이 발견됩니다. 골로새서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특별히 그가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 뒤이어 나오는 골로새서 3-4장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 위의 것을 찾으라
다함께 골로새서 3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먼저 사도 바울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된 옛 본성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었으면…”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듭난 자가 되었으면…”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찾으라’라는 말은 ‘열정적으로 구하다’,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간절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처럼 바울이 열정적으로 찾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위엣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위엣 것’이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전에는 땅의 것,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쾌락이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갔다면, 이제는 그러한 삶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때부터는 한국의 코로나 상황, 한국의 경제상황 등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뉴스에 더욱 더 관심이 기울일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케나다 토론토’ 또는 ‘호주 시드니’와 같은 도시로 이민을 가야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여태까지는 전혀 관심 없었던 그 나라와 그 도시의 경제 상황, 아파트 가격, 생필품 물가, 계절, 날씨, 기후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생길 것입니다. 왜 이런 관심사의 변화가 발생합니까? 그곳에 우리가 들어가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모든 것이 곧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홍콩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지만 의외로 세상 사람들은 그 일이 현재 어떻게 되가는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홍콩에서 태어났고, 비록 지금 미국에 있지만 현재도 홍콩에 집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요? 모든 관심이 홍콩을 향할 것입니다. 또 최근 태국에서는 왕실개혁을 요구하는 전례 없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리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한달 가까이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미국에 살고 있는 태국 시민권자라면 어떠했을까요? 그 때부터는 모든 신경이 그에 관한 뉴스에 집중될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절에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 시민권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비록 잠시 이 세상에 머물러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들어가 살게 될 집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들의 관심은 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도시에 새로 지은 아파트 입주를 준비하는 사람의 경우, 그가 살게 될 도시의 주변 정보들을 탐색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에 장을 볼 마트가 어디에 있는지, 아이들 다니는 학교는 어떤 지, 주변에 집에서 가까운 교회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등등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한 정보를 부지런히 찾기 마련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은, 천국 시민권자들인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지 말씀을 보며 그에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한 지금 이곳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깨닫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 속에서 천국 시민권자 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 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당시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습니다. 예수는 피조물이라 주장하는 이단들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로 인해 성도들의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진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골로새 성도들의 영혼은 더 깊은 좌절과 절망으로 떨어질 위험이 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과 암울한 현실 속에 있는 골로새 성도들을 향해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하게 찾으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지런하게 찾으라. 그 분을 열정적으로 찾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죄악 된 옛 생활 방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찾는 삶이야말로 구원받은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목표와 방향입니다.

2. 위엣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가 위엣 것을 찾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고 과거형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상태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 안에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을 따라 살아가야합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 운전석이 왼쪽에 있습니다. 미국의 도로는 우측 통행입니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과 전혀 다릅니다. 영국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는 좌측 통행입니다. 그래서 우측 통행이 익숙한 한국사람이나 미국 사람들이 영국에 처음가면 운전하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영국에 간 한 사람이 속으로 ‘난 이렇게 좌측 통행하며 운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난 우측 통행하겠다!’하고 생각하고 차선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통사고 나고 크게 다칩니다. 이처럼 나라마다 교통법이 다르듯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살아가는 법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죄악을 따라 살아갈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 방법대로 살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부여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엣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함께 영광의 승리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그 날 우리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한 육체에 있지만, 그 때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소망이 있기에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 필요가 없고, 우리는 오직 위엣 것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지난 2016년도 인도 정부는 검은돈을 근절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화폐개혁은 정부가 일정한 기간을 지정하고 그 기간 동안 시민들이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 화폐개혁 기간이 끝난 이후 곳곳에 버려진 구권 뭉칫돈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돈들이 강과 하수도에 버려지고 있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60만 달라 상당의 구권이 찢어지거나 버려졌습니다. 돈을 제때 바꾸어야 했는데 못 바꾼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인도에서는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난한 지역의 주민들이 이 구권을 주워 가기 위해 흐르는 강물에 들어갔다가 죽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폐개혁으로 인해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종이조각이 되어버린 돈을 줍기 위해서 강물에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도의 화폐개혁으로 인해 구권이 아무런 쓸모가 없음에도 여전히 그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지금도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믿으며 좀 있으면 사라질 물질과 재물을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썩어지고 사라질 이 세상의 물질이나 재물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엄동 설한, 추운 겨울이 되면 시카고의 모든 나무가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봄이 되면 그 안에 잠들고 있던 새순이 다시 돋아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겨울 속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처럼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듯이, 길고 긴 기다림이 다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위엣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의 방향전환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물질을 더 많이 쌓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아둥바둥대며 살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인도의 어느 도시에 흐르는 강물 위에 뿌려진 쓸모 없는 돈들처럼 다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들이 그처럼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위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기억하며 천국시민권자에 걸맞는 삶을 준비하십시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백성이 살아갈 길입니다. 땅의 것을 내려놓고 오직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생각의 방향전환을 일으키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