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혼합주의를 경계하라 (신명기 22장 1-12절)

(신 22:1)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신 22: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
(신 22: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본체 하지 말 것이며
(신 22: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
(신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 22:6)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신 22: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신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신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신 22: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신 22:11)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신 22:12) 입는 겉 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제가 다닌 대학교의 교내식당 게시판에는 이따금씩 돈이 붙어 있곤 했습니다. “000에서 돈 잃어버리신 분 가져가세요.”라는 글 밑에는 천원, 오천원, 심지어 만원도 붙어 있던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제가 다니는 대학교 학생들이 참 양심적인 공동체라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끼고 크게 감격했습니다. 정직하게 생활하고 이웃끼리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고 축복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의 성품에 따라 정직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창 밖을 보니 우리 집 대문 앞에 웬 소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가치는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집 대문 앞에 소가 서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돈 보따리를 놓고 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 주인 몰래 도망친 소이거나, 주인이 잃어버린 소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이처럼 소가 우리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며 속으로 말하기를, ‘이게 웬 횡재냐? 이것도 다 하나님 뜻이다’하고 소를 내 소유물로 삼으면 될까요? 아니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는 내가 소의 주인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소 저기 사는 김집사네 소구만. 지난 달에 김집사가 교회에서 나에게 서운하게 한 게 있으니. 어디 한 번 소 잃고 마음 고생 좀 해보라.’하고 마음먹는다면 그 역시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 아니라 미움에서 우러난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소나 양을 보거든 다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2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신 22:1)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신 22: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 혹시 지금 당장 주인을 찾아주지 못할만큼 멀리 살거나, 아니면 내가 주인을 모르는 경우라면 소와 양을 잘 돌보아 주다가 주인이 오면 그에게 다시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나 양 뿐만 아니라 나귀나 옷이나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몰래 갖거나 못 본 척하지 말고 반드시 그 이웃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어떠한 금전적 유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소와 양 챙겨주느라 수고롭고 번거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이 정직하게 이웃을 돕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삶의 양식임을 가르치셨습니다.
5절에는 옷 입는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여자 옷 입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또한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것도 금지하셨습니다. 이 당시 이교의 문화에서 여자가 임신하기 위해서 남자의 옷을 입는 종교적 미신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거나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성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게 됩니다. 오늘날 남자가 여자와 같이, 또는 여자가 남자처럼 사는 왜곡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통해 남녀가 서로 구별되게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 질서를 무시하는 경우, 죄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성정체성이 망가지고 깨진 인간의 모습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옷을 입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6-7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생명에 대한 자비심과 동정심을 갖도록 교훈하신 규례입니다. “(신 22:6)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신 22: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규례의 내용은 어미 새와 그가 낳은 새끼나 알을 동시에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또한 약자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를 금지하고 계신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새를 잡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미 새도 잡고, 새끼새도 잡으면 더 좋습니다. 팔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할 때 동정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복을 누리게 하시고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새 한 마리 더 잡는 것이 얼마나 대수로운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성경에까지 기록하셔야 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작고 연약한 생명을 대하는 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세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존중사상이 8절에도 이어집니다. “(신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팔레스타인 지역의 집 지붕은 평평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에게 지붕은 취침 장소나 휴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지붕에 올라갈 수 있었기에 지붕 아래로 떨어질 위험성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난간을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도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9-12절 말씀은 씨를 뿌릴 때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포도원에 씨를 뿌릴 때, 두 종자를 섞어 뿌려서는 안 됩니다. 밭을 갈 때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를 씌워 밭을 갈게 해서도 안 됩니다. 옷을 짤 때도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옷을 입어도 안 됩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고구마도 호박과 교접해서 만든 호박고구마 먹습니다. 일반 고구마보다 당도도 높고 수분이 많아 부드러워 찾는 이가 많습니다. 고추는 피망과 풋고추를 결합해 만든 ‘오이고추’가 있습니다. 맵지 않고 아삭하고 시원해서 인기가 많습니다. 토마토도 대추방울토마토가 있습니다. 일반토마토보다 육질이 다단하고 덜 물러, 먹는 느낌이 좋아 보관하기 좋습니다. 이런 개량된 품종을 먹는 현대인 입장에서는 이런 말씀 보면 고개가 기우뚱거립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도 순수 면이 아닙니다. 폴리에스터라 불리는 합성 섬유로 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럼 신명기 말씀에 따라서 이런 옷 입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합성 섬유로 된 옷 입으면 죄를 짓는 것이고 부정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세상의 것과 섞임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삶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죄와 타협하여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고 행동의 원칙 역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 아니면 아래, 오른쪽 아니면 왼쪽 이렇게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섞여 살아가는 삶을 경계하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12절에 “(신 22:12) 입는 겉 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술(tassel)을 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 수 있게 만드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 것이며, 그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하며 기억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옷에 달려 있는 ‘술’의 의미입니다. 옷에 달린 술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쌓으려 살아가지만,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방식과 방법대로 거룩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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