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8 기업 무를 자 보아스와 현숙한 여인 룻 (룻기 3장 1-13절)

(룻 3:1)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룻 3:2)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룻 3: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룻 3: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 3:5)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 3: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룻 3: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룻 3:8)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룻 3: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 3:1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 3:11)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 3:12)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룻 3: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룻 3:14) 룻이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룻 3:15)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룻 3:16)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그 사람의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고
(룻 3:17)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말라 하더이다
(룻 3:18)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상처받고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대인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만큼 힘들고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을 줄 아는 멋진 배려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이웃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룻기에는 바로 이와 같이 자신보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가 룻기를 보면 마음에 ‘힐링’이 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한 번 이 책에 나오는 멋진 인물들을 살펴봅시다. 첫 번째 사람은 룻기의 주인공 룻 입니다.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공양하기 위하여 부모와 정든 고국을 떠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실 룻은 얼마든지 다른 모압 남자 만나 재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젊은 나이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룻은 나오미를 공양하기 위해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우며 땀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룻은 가난하고 힘 없고 나이든 자신의 시모를 버리지 않았고, 끝까지 그녀를 돌보고 책임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멋진 사람은 룻기의 남자 주인공 ‘보아스’ 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 입니다. 재산도 많고, 명망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방 여인 룻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주었고, 소년 일꾼들에게 그녀를 괴롭히지 말라 당부했으며, 룻이 목마를 때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물을 마시도록 허락해 주었고, 허기진 그녀에게 먹을 것도 풍성히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아스는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 번째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룻의 시모 나오미 입니다. 나오미는 그녀의 며느리 룻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진심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네가 잘 살 수 있게 너를 위한 안식처를 내가 알아봐야겠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로 지내며 사는 것을 염려하며, 며느리가 안식할 곳을 찾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룻에게 안식할 곳이란 ‘가정’을 의미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남편 될 사람을 찾아주기를 원했던 것이죠. 나오미는 그녀의 친족 보아스를 룻의 남편으로 염두 해 두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의 순종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때마침 그날 밤은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는 날이었습니다. 오늘날에야 기술이 발달해서 기계를 통해 곡식의 낟알과 쭉정이를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바람이 부는 날, 곡식을 갈퀴에 담아 공중에 던져 낱알과 쭉정이를 분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리를 까부는 날이란 뜻 입니다 일년 동안 열심히 지은 농사를 수확하는 날이니 얼마나 기쁜 잔칫날 입니까? 나오미는 바로 이 날에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룻에게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보아스가 먹고 마시기를 다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가 누울 때, 이불을 들고 그와 함께 누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보아스가 어떻게 해야할지 말해줄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 룻의 입장에서 보면, 시모 나오미가 시킨 내용이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한 명령입니까? 밭에 누워 있는 남자 곁에 가서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고 그와 함께 누우라뇨? 정숙한 여인으로서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한 말에 토달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룻 3:5)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 3: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여기 보면 이 짧은 두 구절에 룻이 나오미의 말대로 했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룻은 나오미의 말에 적극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신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이 자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여인으로서 룻이 젊은 남자들을 두고 나이 든 보아스의 곁에 가서 누우라고 한 시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 입니다.
우리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 속에서 신앙인의 순종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신뢰하여 시어머니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한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룻은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거나 고집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세우거나 고집 부릴 때 발생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생각을 앞세우고 고집 부리며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꺾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오미의 말에 순종한 룻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대부분의 갈등은 해소되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룻은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룻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순종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도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언덕에서 땀방울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도록 열심히 간구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고 자원하여 모진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순종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룻의 순종은 암울한 사사 시대에 다윗이라는 한 줄기 빛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 구원이라는 찬란한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순종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순종을 통하여 주님의 섭리를 이 세상에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귀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순종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은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킨대로, 보아스가 다 먹고 마신 뒤에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발치께로 가서 이불을 가만히 들고 그 곁에 누웠습니다. 한 밤중이 되었을 때 잠이 깬 보아스는 돌아눕다가 그의 발치에 왠 여인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에 룻은 “저는 어르신의 여종 룻 입니다. 어르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되시오니, 저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룻의 이야기를 들은 보아스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방여인인 룻이 나오미를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해 왔는지, 그리고 룻이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파산한 가문을 다시 세워주기 위해 젊은 과부로서 보아스 자신과 같은 나이 많은 자를 찾아왔는지 그 사연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이것이 남녀 간의 낭만적인 사랑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금새 눈치 챘습니다. 또한 보아스는 자신의 곁에서 이불을 같이 덮고 있는 룻에게 그녀가 단지 육신의 정욕을 위해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11절 입니다. “(룻 3:11)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이 컴컴한 밤, 보아스는 비밀리에 룻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나오미의 기업을 사서 대를 이어 줄 책임과 권리를 가진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이 사실을 룻에게 알려주며, 만일 그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면 보아스 자신이 기꺼이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룻이 자신 곁에 누워 있으나, 율법대로라면 자신이 룻을 당장 아내로 맞이할 순서가 아니기에 성급하게 동침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가 젊은 여성이 자신 곁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욕심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서로 속이고, 감추고, 거짓말이 난무하는 시대 입니다. 특별히 성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세상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정직하게 살아가고, 성결하게 살아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 입니다. 보아스는 세상의 정욕과 욕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적인 이익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부유하고 유력한 자였으나,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권리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일을 결정하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오히려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비록 오늘 장면은 보아스가 눈 앞에 있는 룻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컴컴하고 깊은 밤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보아스는 대낮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다는 태도와 자세를 취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보아스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지만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컴컴한 밤 아무도 보는 이 없었으나, 룻과 동침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절차에 따라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람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생활하는 것과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생활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까지 보시는 분이십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는 맞지만, 기업 무를 자로서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있는 그대로 룻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보아스에게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우리들도 보아스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섬김과 희생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실 보아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많은 금전적인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룻기 4장에서 보아스 보다 가까운 친족이 자신에게 끼칠 손해를 염려하여 기업 무르기를 포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가난하고 파산한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주는 보아스의 결정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친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큰 책임감을 수반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또한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파산한 엘리멜렉의 집안을 세워 주어야 하는 큰 부담을 떠 안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신이 그 역할을 감당하기로 결정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아스가 유력한 자였기에, 즉 부자였기에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물론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돈이 많다고 다 이웃을 돕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 수많은 부자들이 있습니다만, 가난한 자를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단 한 푼도 나누지 않고 살아가는 부자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탐심의 노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보아스가 참으로 멋진 사람인 이유는 그는 진심으로 나오미와 룻을 생각하며 ‘기업 무를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보아스에게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 그의 옷자락에 담아 주는 모습 입니다. 그는 룻 뿐만 아니라 그녀를 기다리는 가난한 시모 나오미를 생각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먹을 곡식을 담아 주었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여유가 있다고 다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마음에는 넉넉한 나눔과 베풂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점점 삭막해져 간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따뜻한 정도, 위로도, 이웃과의 나눔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치열한 경쟁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들도 서로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치열한 경쟁과 이기적인 시대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웃을 향한 배려와 나눔의 삶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며, 이웃들에게 나눔과 베푸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대에 보아스와 같이, 룻과 같이, 나오미와 같이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나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태도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