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4 믿음의 가정에 찾아온 고난과 룻의 신앙고백 (룻기 1장 1-22절)

지난주까지 우리는 사사기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사 시대는 말 그대로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좋아 보이는 대로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룻기는 바로 이러한 영적 암흑기인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입니다. 사사 시대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찾아오게 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흉년을 피하고 또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엘리멜렉은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겨 가게 됩니다.
모압 땅에 들어간 후, 엘리멜렉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 죽고 맙니다. 결국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두 아들은 각각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오르바’였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룻’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나오미의 두 아들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제 이 가정은 모든 남자가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오르바와 룻 이렇게 세 사람만 남게 됩니다.
이와 같이 룻기의 시작은 ‘흉년’과 ‘죽음’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전반적인 모습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각한 흉년을 보내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이 흉년의 때에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불순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흉년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가나안 땅에 머물러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흉년 이전부터 살고 있던 그녀의 이웃들이 그를 알아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엘리멜렉의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버리고 이방민족의 땅인 모압으로 도망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신의 소견에 좋을 대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인생에는 ‘흉년’과 ‘죽음’뿐 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흉년을 피하기 위해서 또한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서 약속의 땅인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눈 앞에 보이는 현실과 이해관계에 따라 삶이 좌우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우선시했던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머무는 베들레헴에 거하기 보다, 현실과 타협하며 세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불순종의 땅 모압에 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생각과 유익을 내려놓는 삶 입니다. 비록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모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베들레헴에 거주하기를 선택하는 주의 사람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당시 사회는 부계 중심,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정에서 남자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도 당장 먹고 살아갈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모압에서도 자리 잡지 못한 나오미는 자신이 떠나온 가나안 땅에 흉년이 끝나고 먹을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 지방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이방 사람들이 사는 모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인 베들레헴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빨리 그곳에서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고, 잘못 선택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된 길에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지체하지 말고 그 길에서 빨리 돌아서는 것 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길은 아닙니까? 빨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조차 정리 하시길 바랍니다.
나오미는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에야 자신이 모압에 있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자기와 같이 과부가 된 두 며느리에게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의무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자유롭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나오미는 두 모압 며느리가 아직 젊기에 자신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보다, 모압 남자와 새로 시집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오르바와 룻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한 번 더 이들에게 자신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면 했습니다. 이에 두 며느리 중 오르바는 나오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한 번 더 룻을 설득해서 자신을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룻은 나오미를 따라가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전해 주었습니다. 16-17절 말씀 입니다.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사실 아직 나이가 젊은 룻의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가서 그녀를 부양하는 짐을 지기보다 자유롭게 모압 땅에 머물러 새남자 만나서 시집가는 것이 더 수월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 시어머니 나오미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평탄할 때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 괴로운 시절을 지나갈 때는 삶의 작은 의무도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법 입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 룻에게 나이가 많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부양하는 것도, 그녀를 따라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따라가는 것도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와 함께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을 선택 했습니다.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보면 알 수 있듯이 룻의 이 선택이야말로 가장 복된 선택이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룻과 나오미가 당한 것과 같이 험한 산을 넘어가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흉년과 고난이 있고, 죽음과 같은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여전히 룻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으로 인생의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빗물에 젖지 않고 피어난 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광야를 건너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룻의 선택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선택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가뭄을 해결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그녀를 본 성읍 사람들은 그녀의 귀환 소식에 기뻐하며 동시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오미의 모습이 이전에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 입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남편 엘리멜렉도, 축복의 상징과도 같은 든든한 두 아들도 함께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빈털터리의 모습으로 고향 땅에 돌아온 것입니다.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했습니다. ‘나오미’란 ‘사랑스러운 자’ 혹은 ‘기쁘고 유쾌함’이란 뜻 입니다. 그에 비해 ‘마라’는 ‘쓰라림’, ‘괴로움’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난 지 10년만에 돌아온 나오미 가정은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는 자신이 이와 같이 괴로운 신세가 된 것은 전부 하나님의 하신 일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20-21절 입니다. “(룻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여기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라는 표현을 20절과 21절에 모두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럼 나오미가 볼 때 왜 하나님은 그녀를 심히 괴롭게 하셨을까요?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라는 표현 보이십니까? 아무도 나오미에게 왜 그녀에게 이런 불행과 고통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해석해 주거나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오미는 스스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베들레헴을 버리고 모압을 택한 자신의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나오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징벌하셨다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떠나 모압에서 살아가다가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본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를 연상시켜 줍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지에 가서 살 때 극심한 기근을 겪고 돼지 쥐엄열매를 먹어야 하는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되었지요. 탕자는 그제서야 비로서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도 나오미나 탕자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나 세상 가운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인생의 괴로움과 고통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혹시 지금 자신의 삶에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고 있기에 주님이 주신 괴로움과 고통이 있는 분은 없을까요? 속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방황하고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어서 돌아오라는 sign으로 삶에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서 빨리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괴로움과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분명 괴로움과 고통을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돌아간 나오미와 탕자의 삶에서도 그리하셨듯이 주님께 돌아간 자들의 삶의 문제들도 크신 은혜를 통해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쓰라림’, ‘괴로움’이란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이상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마라가 아니었습니다. 나오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미 하나님은 그녀의 회복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이순간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큰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위해 예비해 두셨던 하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부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망하기를 바래서 괴로움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가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의 매를 드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영혼이 옳은 길로 향할 수 있도록 고난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 인생의 큰 괴로움과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은 하루 빨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복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당장의 가뭄과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이 생각한 풍성한 삶이 아닌 상실과 궁핍을 안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인생의 빈그릇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를 부양해야하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고난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룻이 하나님을 선택하자 하나님은 그녀의 삶에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풍성하고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