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3 기드온과 삼백 용사 (사사기 6장 24절 ~ 7장 25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사로 선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미디안의 압제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전 먼저 그의 집에 있는 바알 제단을 없애버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이름은 ‘요아스’라는 사람 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의 불’이란 뜻 입니다. 그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 여호와가 아닌 바알을 위해 불을 피우는 제단이 있었으니 참 모순적 입니다. 기드온의 집에 있던 바알을 위한 제단은 개인용이 아니라, 성읍 사람들 모두가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하던 제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성읍 사람들이 찾아와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집에 가지고 있었으니,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 역할을 했거나 아니면 제단을 지키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돈을 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바알 제단은 기드온 집안의 명예와 재물을 가져다 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바로 이 제단을 파괴하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우상을 먼저 제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나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기드온이 우상을 찍어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미디안의 괴롭힘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우상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들도 계속해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끊어내라고,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시는 죄악은 없습니까? 결단하고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허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관리하고, 모든 성읍 사람들이 사용하는 제단을 대낮에 허문다는 것은 무척이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난 바알 추종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일 입니다. 기드온은 목숨을 걸고 이 일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성읍 모든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신이며, 최고 신이라고 여기며 섬기는 바알의 제단을 허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겠습니까? 우리는 기드온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고 이 일을 행했을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의 아버지가 관리하고 있던 바알 제단은 그의 집에 큰 경제적 수익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것을 허물었을 때 가족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한 기드온은 환한 대낮이 아닌 컴컴한 밤중에 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알의 단을 허물고, 아세라 우상을 찍어버렸고, 그 옆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쌓고, 수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 드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성읍 사람들은 바알의 제단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바알 제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화가 난 사람들은 수소문하여 결국 이 모든 일이 기드온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들은 당장 요아스의 집에 찾아가 기드온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알 제단을 부셨다는 이유로 기드온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나안 족속 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므낫세 지파 사람들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이 바알의 제단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분노하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우상숭배에 심취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표면적 문제는 미디안의 압제를 당하고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이었으나, 진짜 문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고 있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 였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바알이 정말 신이라면 그가 자신의 제단을 훼파한 기드온을 직접 치도록 자신의 아들을 내버려두라고 말 했습니다.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의 말을 듣고 기드온을 죽이려고 했던 마음을 돌리고, 바알이 기드온을 직접 심판하고 벌 줄 것을 기다리기로 결정 합니다. 이 사건으로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여룹바알’이란 말은 ‘바알과 다투는 자’란 뜻 입니다.
자, 이와 같이 기드온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집에 세워진 바알 제단을 제거하자, 그제서야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일하시기 시작 합니다. 34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사사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의미 입니다.
33절 말씀을 보니까 미디안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과 연합하여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 므깃도 지역 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이스르엘 골짜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 모습을 보았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적군의 숫자에 압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한 기드온은 용기를 내어 나팔을 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 했습니다. 35절에 기드온을 통해 소집된 지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 입니다. 왜 지금 엄청난 숫자의 적군과의 싸움을 앞두고, 기드온은 열두 지파를 다 소집하지 않았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들의 연대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미디안 군대는 지난 7년 동안 강력한 낙태 부대를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습니다. 낙타 부대는 산지로는 잘 가지 않고, 평지로만 다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군대를 피해 산 속으로 굴 속으로 도망쳐 숨어 지낸 것이죠. 기드온의 나팔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보면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와 같이 산지에 사는 지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미디안의 침략에도 비교적 피해가 적은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이 나팔을 불었을 때도 미디안과의 전쟁에도 잘 나서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싸움을 위해 지파를 소집 했으나, 생각보다 많이 모이지 않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이에 그는 하나님께 징표를 구했습니다. 그 유명한 기드온의 ‘양털’ 사건 입니다. 그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장 마당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말라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대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임을 믿기로 결정합니다. 다음 날이 되자 그의 말대로 주변 땅은 말라 있었고, 양털은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 제가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역시 하나님 뜻은 정확하십시다.”하고 나가서 싸울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또 한 번 표지를 구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양털의 이슬은 마르기가 쉽지 않지만 땅은 해가 뜨거나 바람이 불면 마르기 쉬운 성질을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혹시 전에 자신이 구했던 표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하신 일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자연 현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반대로 구했습니다. 이번에는 땅은 다 젖고, 양털은 말라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의 요청대로 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드온의 양털 장면을 보고, 기도할 때 표지를 구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사기는 지금 뒤로 갈수록 이스라엘을 구원받기 위해 선택된 사사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 보다 앞선 사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양털을 통해 표지를 구했던 것이죠. 우리는 신앙의 밸런스를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표지를 구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표시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부족한 기드온의 요청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양털 사건을 통해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이스라엘 진영에서 전쟁을 하기 위해 모인 숫자가 3만 2천명 입니다. 많은 숫자 같아 보이지만, 미디안 군사는 13만 5천명이나 됩니다. 적군이 약 4배나 더 많은 상황 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절대로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기드온은 ‘어떻게 이 적은 병력을 가지고 미디안 군대를 이길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기드온이 놀랄만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기드온아, 너와 함께 있는 군사가 너무 많다.”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지금 적군이 이스라엘보다 군사 숫자가 4배는 더 많은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군사가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유인즉슨 만일 이대로 이스라엘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미디안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네? 우리가 생각보다 힘이 세구나?” 하는 식으로 교만하게 될 것을 방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사기 7장 2절 말씀을 봅시다. “(삿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미디안과 싸우기 두려운 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3만 2천 명 중에 무려 2만 2천명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전력의 2/3이가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군대 숫자 차이가 4대 1에서 13대 1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 한 사람이 미디안 사람 13명을 상대해서 싸워야 하는 더 불가능해 보이고 힘든 전쟁으로 바뀐 것입니다. 기드온은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기드온에게 지금도 너무 군사들이 많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또 다시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중 싸울만한 자격이 있는 자를 택하시기 위해 병사들을 물을 마시는 샘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웬만한 장소에 가면 다 마실 물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돈을 주고 사먹어도 됩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물이 귀합니다. 게다가 무척 더운 지역 입니다. 그러니 시원한 샘물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손에 잡고 있던 병기를 다 내려놓고, 샘물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뜨거운 태양에 더워진 머리를 물 속에 담그며 벌컥벌컥 물을 마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혀로 핥아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정확하게 300명 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300명을 미디안과 싸울 정예의 용사로 선택 하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 300명을 고르셨는지 질문해 왔습니다. 과연 물 마시는 자세와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성경 학자들은 아마도 이 300명이 물을 마시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한 손에는 병기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물을 마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전쟁터에서 마른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을 만나도 주변에 있을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을 수 있는 침착하고 신중한 사람들만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300명은 전쟁에 어쩔 수 없이 의무감으로 나온 자들도 아니요, 이스라엘을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온 사람들 입니다. 자, 이제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병력 차는 더 벌어져 450대 1이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전력 차이로 인해 미디안이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병사들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 불가능해 보이는 450대 1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확실히 온 천하에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자, 300명 밖에 안 되는 군사를 이끌게 된 기드온은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불신과 의심이 찾아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300명으로 13만 5천 명을 상대한단 말인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괜히 싸우러 나갔다가 개죽음만 당하는 것 아닐까?” 이와 같이 겁에 질리고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향해 하나님께는 또 다시 승리의 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기드온에게 미디안 진영을 염탐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기드온이 본 미디안 진영은 끝을 알 수 없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삿 7:12)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누구라도 300명으로 이 수다한 적군을 상대하려면 오금이 저리고 겁이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마침 미디안 두 병사가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됩니다. “이보게, 내가 꿈을 꾸었는데 말일세, 보리빵 한 덩어리가 산에서 우리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왔어. 그렇게 장막 가까이로 굴러 들어오더니만, 그 보리빵 덩어리가 장막을 치니 장막이 “와르르”하고 무너지는 게 아닌가!”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또 다른 미디안 병사가 말했습니다. “그 꿈은 다른 꿈이 아닐세.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란 자의 칼을 나타내는 꿈이야. 하나님이 미디안 사람들과 우리 진영을 그자의 손에 넘기신 거야.” 조금 전 미디안 병사가 말한 ‘보리빵’은 고급 음식이 아닙니다. 서민들이 일상에서 자주 먹는 매우 값싼 빵 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 성경에는 ‘덩어리’로 해석된 히브리어는 ‘말라비틀어진’이란 해석도 가능 합니다. 즉 미디안 병사가 꿈에서 본 것은 ‘말라 비틀어진 값싼 보리빵’이었습니다. 갓 구운 빵도 아니고, 척박한 땅에서 자란 거친 보리 빵 입니다. 이 말라비틀어진 보리빵은 기드온을 상징 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기드온이 얼마나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말라비틀어진 값싼 보리빵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나 볼품 없는 빵 입니까? 서민들도 돈이 없어서 사먹는 빵이지, 돈 만 있으면, 보리 빵이 아니라 밀 빵을 사 먹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연약하고 볼품 없는 자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족하고 작은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그 사람이 힘이 없고 연약하고 볼품 없을수록 하나님의 크심이 더 잘 나타나기 때문 입니다. 내 자신이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입니다. 자신은 특별한 재능도 없고, 가진 것도 많치 않아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말라비틀어진 보리빵’ 같은 인생도 사용하십니다. 말라비틀어진 보리빵 같은 보잘 것 없는 인생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민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가 사용한 무기도 매우 독특 합니다. 빈 항아리, 항아리 안에 든 횃불, 나팔 이게 전부 입니다. 칼 한 자루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은 450대 1이라는 불가능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쟁이기 때문 입니다. 결국 미디안 군사들은 기드온과 삼백용사들의 횃불과 나팔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며 서로 자기들끼리 칼로 싸워 자멸해 버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입니다. 13만 5천명을 상대로 300명이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들고 싸워 승리한 놀라운 전쟁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혹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야 하고, 명문 대학을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관점 일뿐 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말라비틀어진 보리빵 같은 인생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천하의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됩니다.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과 같이 전쟁에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물품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끝을 알 수 없는 적군을 이기는 승리의 도구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능력 입니다. 기드온과 삼백용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간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행복은 내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될 것이고, 가장 풍성한 삶이 될 것입니다.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뛰어난 자라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권능이 크신 분이시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크시고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매일매일 이 세상에서 놀라운 승리를 쟁취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