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4] (전체예배영상) 마가복음 시리즈 (2) “열 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 (마가복음 3장 7~19절)

<서론> 지혜를 가르쳐줄 스승을 찾았는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세 사람은 부모, 스승, 그리고 벗이라고 합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부모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바로 ‘스승’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존경할만한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길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을 킨 것과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만큼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복 입니다. 혹시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지금까지도 나의 가슴 한구석에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한 스승이 계십니까? ‘나의 인생에서 그 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성장이나 성숙을 기대할 수 없었겠구나?’하고 생각될 만큼 좋은 영향력을 끼친 스승이 있습니까? 만일 그런 스승을 한 사람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복된 인생 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요즘 우리 시대를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디에 가면 이런 훌륭한 스승을 찾을 수 있을까요? 좋은 스승을 찾는 일은 파랑새를 찾는 것만큼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을 한 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이 던진 모든 질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신 분이며, 우리가 세상에 지쳐 힘들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스승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와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보다 탁월한 스승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내게 오라”, “내게 배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제자인지, 예수님께서 마음에 두었던 사람들은 무엇이 달랐는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아주 흥미로운 대목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들을 모두 한 부류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부류인지 한 번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7절 말씀 입니다. “(막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자’와 ‘무리’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죠.

1. 어떤 사람이 제자인가? 제자와 무리의 차이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바로 이처럼 ‘제자’와 ‘무리’로 나누어서 부릅니다. 한 번 몇가지 예를 살펴 볼까요? 마태복음 5장 1절 입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가복음 8장 34절 입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7장 11절 입니다.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는 복음서의 특징이 보이십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를 ‘제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분명 ‘제자’였으나, 어떤 이들은 ‘무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그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핵심적인 모습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모습이 있는 사람이 제자 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기는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은 무리 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십자가를 짊어질 생각이 없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 무리 입니다.
‘무리’는 현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는 것 등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육체적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버리는 자들 입니다. 실제로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두려워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과 바다 위를 걸어서 오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예수님 계시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대로 살 수 없다고 거부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 말씀을 봅시다.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무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현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거룩함을 위한 대가 지불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저 자신이 보기 좋아하는 것만 보고, 듣기 좋아하는 것만 듣기를 원합니다. 무리는 현상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 입니다.
카일 아이들만이란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제목의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Not a fan’ 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팬과 제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책에서 카일 목사님은 “팬은 와서 환호하다가 사라져버리는 사람이며 제자는 와서 죽고 섬기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무리와 제자의 차이도 이와 똑같습니다.
한 때 잘나갔던 인기스타들을 보십시오. 가수이든지 연기자이든지 한 때는 없으면 죽을 것처럼 소리치고 추종하고 따라다니던, 영원할 것 같았던 소녀팬들도 스타의 인기가 사라지면서 점차 스타에 대한 애정도 굴뚝 위로 날아가는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이 세상의 인기와 명예라는 것이 아침 안개 같거든요. 그렇게 인기가 사라져버리면, 또 다시 이제는 다른 인기스타에게 모든 애정이 옮겨 갑니다. 그것이 바로 ‘팬’의 특징 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다릅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영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을 거부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요한복음 6장 67-6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수많은 무리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랐으나, 그분을 더 가까이에서 따라가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중간에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끝까지 주님 곁에 남았습니다.
카일 아이들만 목사님은 그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자신의 팬이 많아지는 것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아니면 제자가 많아지는 것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팬이 많아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관심이 있으세요. 우리가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따라가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으세요. 사람들은 신앙의 연수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 얼마나 다니셨어요? 직분이 뭐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신앙의 연수’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 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주님만 따라가는 사람, 좋아도 어려워도 주님만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제자 입니다.
먼저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 봅시다. 나는 제자입니까? 아니면 무리 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팬 입니까? 우리 중에 누가 더 교회 오래 다녔냐 경쟁하려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아요. 그러나 왜 교회 나오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면 여전히 그 사람은 ‘무리’일 뿐 입니다. 무리의 특징은 현상을 좇아갑니다.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데까지만 좇아갑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과 섬김과 헌신의 생활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제자는 다릅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합니다. 힘들고 고단한 길일지라도 주님께서 가라 하시니 포기하지 않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복음서에는 분명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을 두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다 제자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만족과 유익을 위해 현상을 따라다니는 무리가 있었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어느 쪽에 서 계십니까? 무리 쪽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제자 쪽에 서 계십니까?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짜로 예수 닮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도록 내 삶을 주님께 기꺼이 드리는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 받은 사람들
조금 전 말씀 드린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모든 사람이 다 제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이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또 열두 명을 택하셔서 공식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본문 13절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함께 볼까요? “(막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예수님의 제자 선정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라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는 사람 아무나 무작위로 제자로 뽑으신 걸까요? “이야, 시몬 베드로, 근육 좀 보소? 너 힘 꽤나 쓰겠구나? 이야 너 피부가 검게 그을렸구나. 너 어디 갈릴리 샵에서 태닝했니? 너 내 맘에 든다. 좋아 너 제자 합격!” 뭐 이런 식일리가 없지 않습니까? 뭔가 기준이 있지 않았겠어요? 사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는 장면이 기록된 누가복음에는 기록된 비밀이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함께 봅시다. 누가복음 6장 12-13절 말씀 입니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성경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면들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예수님께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밤이 맞도록’, ‘밤새다’란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컴컴하고 어두운 밤부터 시작된 기도가 아침 해가 밝아 올 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붙잡고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귀중한 천국 복음을 예수님의 뒤를 이어 전수할 제자를 고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조건이나 능력을 보고 그들을 택하실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적인 요소를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하버드 대학교 나온 사람들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에 친척들 심지어 친구들도 자랑하고 다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은 하버드대 들어간 것 보다 더 자랑할 일 아니겠습니까?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영광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큰 자부심을 가질 사건 입니다.
제가 이전에 설교 때 한 번 인용한 이야기 입니다. 먼 옛날 중국에 말 감정사로 이름을 날린 별명이 ‘백락’이라 불리는 ‘손양’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을 보는 안목이 얼마나 유명한지, 평범하고 주목받지 못하던 말도 백락이 지나가다 발길을 멈추고 한 번 눈길만 줘도 그 자리에서 말 값이 열 배나 뛰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는 날 이 백락이 중국의 태행산 고개를 넘어가게 됩니다. 이 산은 오르막이 험악 하기로 유명한 산 입니다. 조금 걷다 보니, 저 먼치에서 무거운 소금 수레를 끌고 힘겹게 비탈길을 오르는 말 한 마리가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살도 없어 비쩍 마르고 늙은 말 한 마리 입니다. 꼬리는 축 늘어지고 무릎은 고된 노동으로 다 구부러지고, 등가죽은 채찍을 얼마나 맞았는지 다 벗겨진 채 침 범벅, 땀 범벅이 되어 죽을 힘을 다해 태행산 오르막을 오르려 하는 거죠. 아무리 애를 써도 무거운 소금 가마니를 싫은 수레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도 없이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합니다.
백락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이 타던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그 비루먹은 늙은 말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자기가 입던 값진 비단 옷을 벗어 말에게 덮어 주었습니다. 백락은 소금 수레를 끌고 있던 이 비루먹은 말이 사실은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거죠. 어쩌다가 이 귀한 천리마가 마음 것 달려 보지도 못하고, 태행산 가파른 오르막에서 소금 수레나 끌고 있나…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린 거에요. “이렇게 가엾게 살 말이 아닌데…” 그 말도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절규하듯 울부짖었어요. 드디어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다는 탄식의 울부짖음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탄생한 사자성어가 바로 ‘기복염거’ 입니다. ‘기복염거(驥服鹽車)’란, 천리마가 소금 마차를 끈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가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걸맞지 않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혹시 우리들이 바로 이 기복염거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라고 천리마처럼 멋지게 만들어 주셨는데, 이 세상 허무한 것들에 눈이 멀어 소금 마차 끌고 다니는 비루 먹은 말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천리마가 소금 마차 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보고 안타까워 울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저렇게 세상에서 소금 마차나 끌라고 만든 인생이 아닌데, 나의 제자가 되어 세상에서 당당하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만든 인생인데… 어찌 이렇게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이처럼 말이란 동물도 자신을 알아봐주는 주인 하나만 잘 만나도 그의 운명이 소금 마차 끄는 말에서 온 세상을 누비는 천리마로 바뀔 수 있었어요. 왜 아무도 모르는 일반 시민이었는데 길거리 지나가다가 연애기획사에서 일하는 사람 하나 잘 만나서 대스타가 된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그만큼 큰 복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치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엄청난 사건 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이죠. 이를 감추지 마시고,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와 소망대로 제자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제자의 사명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고자 부르신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14-1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막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세 가지 였습니다. 첫째로 그들로 주님과 함께 하도록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혼자서는 외로워서 불렀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그들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만들기 위함 입니다. 둘째는 전도를 위해서 입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셋째로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갖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축사사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둠의 세력을 복음의 빛으로 물리치기 위한 중요한 사역을 의미 합니다. 귀신이나 어두운 세력들로 인해 초래되는 혼란을 막고, 많은 아픈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배우고,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 안에서 복음대로 살아가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복음의 일꾼 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저는 오늘 설교 서두에 이 시대는 선생은 많으나 스승이 부족한 시대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부족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무리는 많으나 제자가 부족합니다. 인기스타를 따라가듯, 팬심을 갖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무리는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살아갈 제자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제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런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들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무리 입니까? 제자 입니까? 소금 마차를 끌고 다니는 무리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천리마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는 제자가 되시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이끌리는 무리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제자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앞서가신 우리 구주의 본을 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