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4] (전체예배영상) 성경인물 시리즈 베드로 (4) 베드로, 실패를 넘어서다 (요한복음 21장 15-19절)

서론. 실패를 겪고 난 후…

“내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실패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이 질문에 “결혼이다”라고 대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결혼처럼 한 번 선택하면 뒤 돌리기 쉽지 않은 선택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비지니스에서 인생의 쓴 맛을 제대로 맛 본 분들도 있습니다. 평생 모아온 피 같은 돈을 사람 하나 잘 못 믿어서 다 날린 분도 있고,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버려야 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큼직한 실패들만 이야기해 보았습니다만 사실 우리 중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실패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한 다음 입니다. 왜 실패했는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 또 이제 앞으로 어떻게 그 실패를 극복할 것인가? 방향을 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실패를 넘어선 베드로의 살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가는데 실패 했습니다. 로마 병사들과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 했습니다. 그 마지막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결코 모른다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했던 그 날 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날 밤 이후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도 포기하고, 그토록 꿈꿔왔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그물을 던지며 이전에 하던 어부 일을 다시 시작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그 누구보다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시절이 꿈처럼 느껴졌고,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번씩이나 베드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끄럽고 창피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외면하고 고개를 숙이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일어나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던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과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베드로는 자신에게는 제자로서 살아갈 자격도 없고 자질도 없다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은 고상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자신과 같은 배신자, 변절자, 실패자가 감당할 것은 아니라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할 줄 알던 어부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1. 실패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자, 이와 같이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포기한 베드로,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맛본 베드로…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는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우리 주님은 바로 그 바닷가에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실패자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또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도 처음이 아니라 세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봅시다. “(요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우리 같으면, 베드로 같은 배신자는 찾아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버린 제자,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어떻게 다시 찾아갑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에 베드로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버리고 배신 했다는 사실 때문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치가 떨려서 찾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오늘 주님은 그런 실패자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다 버려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의 풍족함으로 채우시고, 우리의 못남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실패자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그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나, 주님은 여전히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 오셨을까요?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으나, 예수님은 여전히 베드로를 사랑하시기 때문 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부끄러움과 수치로 인해 먼저 주님을 찾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있는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놀라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친해 그를 위해서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12-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2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우리가 베드로 시리즈 전에 했던 시리즈가 엘리야 시리즈 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 여왕을 피해 광야로 도망 쳤을 때, 엘리야의 삶을 통틀어 가장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가 영적 침체와 육체적 탈진을 경험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친히 밥상을 차려 주셨던 장면 혹시 기억 나십니까? 오늘 본문도 그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지친 주님의 자녀들을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지친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상처 입은 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십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지 않았어요. 자신을 부인했다고 그를 비난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기 잡느라 고생한 베드로를 위해서 아침밥 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숯불도 피워 두셨고요, 생선과 빵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주님이 정말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 나 같은 배신자를 왜 찾아오셨지? 난 주님께 이런 대접 받을 자격이 없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죄송해서 눈물이 핑 돌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언제 예수님께서 “너 왜 나를 버리고 떠났니? 너 왜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니?” 하고 책망 하실까 뜨끔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좌불안석으로 안절부절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걱정하던 그 어떤 비난 책망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피곤하고 굶주린 베드로에게 빵과 숯불구이 생선을 먹게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화해와 연합의 상징입니다. 전쟁을 하는 두 적국이 서로 한 자리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두 국가의 원수가 한 자리에서 만찬을 갖는다는 것은 그 두 나라의 관계가 개선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 집에 식사하도록 초대한다면 어떤 사람을 초대하시겠습니까? 같이 밥 먹으면 체할 것 같은 사람은 초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기만 해도 미운 사람, 같이 있으면 저절로 화가 나는 원수 같은 사람은 초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나의 식탁에 초대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교제하길 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아침 식탁에 초대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여전히 그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며 베드로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 잘못은 베드로가 저질렀어요. 용서 받아야 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세요.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화해와 연합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먼저 자신을 찾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어요. 만일 예수님이 속으로 꿍 해 있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 다시 만날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께서 먼저 배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실패자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그에게 밥상을 차려주심으로써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지금도 실패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들도 사람들하고 지내다 보면, 때로는 나에게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에게 이상한 말, 하지 말아야 하는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행동을 해서 나에게 밉보이거나 해를 끼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밉습니까? 나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해 화도 나고, 나를 이상하게 만든 상대방이 악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상대방도 그 사실을 인식해서 나를 어색해 하는 경우도 있고, 멀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때 친했던 같은 교회 교우일수도 있어요. 한 때 정말 친하게 지냈는데, 교회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몇 가지 헤프닝이 발생하면서 점차 멀어지는 거죠. 혹 그 사람이 내 친구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내 부모, 형제, 자매, 심지어 자식일 수도 있어요. 부모 자녀 사이에서도 서로 말로 상처 주고 안 보는 집들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럴 때 만일 우리가 먼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혹 오늘 예수님처럼 그를 우리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값진 사랑의 표현이 되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분명 어려운 선택 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배신한 제자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들도 우리에게 상처 준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한 제자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사람이 한 번 실수한 것은 정말 실수이지만, 두 번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몇 번이나 부인했습니까?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실수가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예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거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 입니다. 지난 3년 동안 가장 예수님께 총애 받고, 그 누구보다 예수님 곁에서 가까이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자신을 버렸으니 예수님 마음에 얼마나 큰 스크레치가 생겼을까요? “베드로, 내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나한태 그러면 안 되지”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그런 미움을 능가하셨어요.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당신의 풍족함으로 채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주님의 사랑으로 덮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실패자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실패한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이웃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찾아가 우리의 삶에 초대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실패자의 마음을 치료하시는 예수님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화해와 연합의 제스처 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계속해서 교제하기를 원하셨어요. 아침 식사가 다 끝난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가지 동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Do you love me?” 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을 봅시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 질문의 숨은 뜻은 이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널 여전히 사랑한단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너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으냐?”) 자, 15, 16, 17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 동일한 질문을 베드로에게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물어 보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대목에 대해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기회를 주심으로서 그의 부끄러운 상처를 씻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속 수치를 씻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내면에 죄가 주는 수치가 있습니다. “너 같은 것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너 같이 사는 사람이 무슨 목사냐? 나는 너가 어떻게 사는 줄 아는데 네가 어떻게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하냐?” 죄가 우리의 마음을 자꾸만 짓누르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이 깊은 상처와 수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지난 날 그의 과거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제자냐…” 하는 마음이 그 안에 가득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가 주는 마음의 정죄함을 없애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the Second chance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세 번 “예수를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심으로서 예수님은 그의 마음 속 부끄러움과 상처를 씻어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 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죄를 지은 우리들의 삶에 찾아오셔서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가 사함 받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가 우리들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모든 부끄러움과 수치를 씻어 주신 것처럼, 죄로 인한 우리들의 부끄러움과 수치 또한 씻어 주실 것입니다.
자,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 오늘 본문 15, 16, 17절 말씀을 한 번 주의해서 보세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뭐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부르셨어요?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왜 예수님은 갑자기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사실 베드로란 이름은 누가 지어준 거에요?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무엇입니까? 시몬 입니다. 말씀을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장 42절 입니다.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호칭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불리던 호칭 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를 마치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처음처럼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난 못 된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천국 가긴 힘들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난 용서 못하실거야” 이런 내면의 목소리들은 다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봅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7절 말씀 다시 보세요. 이 말씀의 대상이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아이든지 노인이든지, 죄 많은 사람이든지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를 짓기 이전의 모습처럼 다시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내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이 오늘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구원의 길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심으로써 마치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그날처럼 그를 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아직 예수님을 부인하기 이전에, 그가 예수님을 버리기 이전 모습처럼 ‘또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입니다. 우리 주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치유하지 못할 우리의 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실패한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고쳐 주십니다. 죄로 인한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니다.

3. 실패자에게 다시 한 번 사명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대답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한 마디의 고백으로 베드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한 번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물어보시자, 베드로는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고백이 얼마나 연약한 지, 또 얼마든지 변질 될 수 있는 지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사랑 고백도 여전히 받아 주십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 많고 많은 질문 중 “Do you love me?”를 물어보셨을까요? 그것은 양을 먹일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사랑이 사명을 감당케 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이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어머니들이 아기들이 밤낮으로 아기를 돌보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하루에 몇 번씩이나 그 더러운 똥기저귀 다 갈아주고 새로 입혀주고, 새벽에 울면 귀찮고 힘들어도 일어나서 달래주고… 자기도 몹시 지치고 힘든데도 먼저 아기 먹을 것 준비하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사랑’ 입니다. 사랑이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이따금씩 남편이 병들고 나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옆에서, 똑같이 나이 드신 아내 분들이 간병하는 모습을 봅니다. 본인도 힘든 몸인데.. 도망가지 안고 병원에서 남편 간병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사랑이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패자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감당할 기회를 주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것 물어 보시지 않고 오직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을 점검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 사역이 짐처럼 느껴집니까? 영혼을 돌보는 일에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이 목양의 짐을 벗어버리고 멀리 도망치고 싶습니까? 먼저 주님을 향한 내 마음부터 점검하십시오. 사랑이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맡기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 서두에 “내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실패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여러분께 드렸습니다. 내 살에 있어 큰 실패가 무엇이든지 오늘 주님은 그 실패를 넘어서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러하시기 위해 단 하나의 질문은 꼭 확인하십니다. “Do you love me?” 우리가 주님의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치유하시고 우리의 삶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 받고,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통해 베드로와 같이 실패를 넘어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