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0] (전체예배영상) 골로새서 시리즈 (2) 그리스도를 소개함 (골로새서 1장 13-23절)

서론. 골로새교회에 찾아온 위기
골로새교회는 그 지역의 특성상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주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의 경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전혀 다른 신을 섬기거나 전혀 다른 종교 문화에 익숙한 채 평생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 종교에서 배워 익숙했던 사상이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교에서 가르치던 그리스 철학사상의 영향이 성도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은 불완전하고 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만 완전하고 선하다’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설파하며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물질은 악하기 때문에, 물질은 인간의 몸도 불완전하고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결과, 골로새교회 내부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이단의 가르침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환상이었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까지도 모두 다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불완전하고 악한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성육신’교리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려고 했던 깃입니다.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은 교회의 기둥과 토대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가르치는 이교의 사상과 가르침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게 했습니다. 즉 예수가 우리 중 한 사람과 같이 육체를 가지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태어난 존재라면, 예수는 결코 하나님일수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일수도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만일 예수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그는 창조주, 구원주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처럼 골로새교회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활동으로 인해 거짓 가르침과 사상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성도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의 리더인 ‘에바브라’로부터 이와 같은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전달받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 되심을 강조하며 글을 적었습니다. 그 결과 골로새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정확하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책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들도 골로새교회 성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믿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상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면 그분을 신뢰할 수 없고, 그 결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로 결정됩니다. 또한 그 신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흔들리고 있는 골로새교회를 향해 바울이 담대하게 선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진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 바울은 총 4가지로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구속자 되시는 그리스도’, ‘창조주 되시는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화평의 주 되시는 그리스도’ 입니다. 각각의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속자 되시는 그리스도 (13-14절)
첫째로, 구속자 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신 ‘구속자’라고 소개합니다. 13-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 13절에 나오는 ‘흑암’이라는 말은 시커먼 ‘죄’를 나타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가 가진 권세가 우리의 힘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저주와 죽음 아래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흑암의 권세’ 즉 ‘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놀라운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를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풀려났다고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14절에 있는 ‘구속’이란 단어에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구속’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구원이나 구속이나 다 같은 것 아닌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성경을 봅니다. 그러나 구원과 구속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구원이란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행위 같이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구속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한문부터 풀이해 보면 ‘구원할 구’(救), ‘속죄할 속’(贖)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자로 보면, ‘구속’은 ‘구원하기 위해 죄를 속하여 준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구속’(Redemption)이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내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악한 주인 밑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주인에게 노예의 몸값을 지불해야만이 노예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권세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러 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를 ‘구속자 되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죄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가 없는 존재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죄인이기에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 했던 죄의 값인 죽음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치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죄로 인해 받아야할 우리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흑암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우리의 ‘구속자 되시는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2. 창조주 되시는 그리스도 (15-17절)
둘째로 창조주 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죄의 값을 치러 주신 ‘구속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예수가 창조주시라는 이 진리의 말씀을 꼭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골로새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거짓 교사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 예수님이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믿게 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창조주인가 피조물인가?’하는 문제는 골로새교회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 세력들은 끊임없이 교회에 도전해 왔고, 그 결과 수세기에 걸쳐 끝없는 논쟁에 논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이후에도 수많은 이단들을 낳았습니다. A.D 325년 6월 19 터키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 예수를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이름이 익숙한 이단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왜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입니까?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이단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가볍게 넘길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15절 말씀을 봅시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여기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바울은 예수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울 속 비췬 내 모습이나 사진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과 뼈가 없으시고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눈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을 봅시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 말씀을 봅시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빌립에게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다시 골로새서 1장 15절로 돌아가봅시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절에 나오는 두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등장하는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이단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을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근거로 “이것 봐라 말씀에도 예수는 피조물이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이단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본문이 실제로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창조된 피조물이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결코 피조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첫번째 피조물’이란 뜻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능가하시는 탁월한 존재’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우위’에 계신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이 이와 같이 예수께서 갖고 계신 초월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16절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봅시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바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이와 다른 가르침을 주장하는 교회들은 이단이 됩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무엇을 창조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하늘가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무슨 말일까요?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만드셨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께서 ‘보좌들’,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까지도 다 만드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보좌들은 ‘왕권’을, 주관들은 ‘주권’을, 정사들은 ‘통치자들’을, 권세는 말 그대로 권세를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에 있는 가장 높은 ‘왕권’, 나라와 사람들을 다스리는 ‘주권’, ‘통치자’, ‘권세’ 이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왕들이나 통치자들이 아무리 강력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힘과 권세의 진정한 소유자는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창조된 목적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였다고 말합니다.
17절을 봅시다.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최초의 인간인 아담도 세상이 만들어진 후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도 이미 계셨습니다. 즉 하늘과 땅, 해와 달이 아직 창조되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존재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먼저 계신 분임을 언급함으로써 주님이 그 어떤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신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17절 후반절은 보면,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 세상이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도록 창조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세상을 놓아 버리신다면, 아침 안개 사라지듯이, 온 우주가 소멸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되시는 그리스도가 갖고 계신 권능입니다. 온 세상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이 다 그의 것이며,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3.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18-19절)
셋째로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하며,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팔이나 다리 하나 없으면 일상생활이 매우 불편하겠으나 여전히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다릅니다. 머리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합니다. 머리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몸에서 머리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머리에서 지시하는 명령에 따라 모든 신경 체계가 움직이듯이, 교회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움직이게 하는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이 당시 많은 이단들과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머리인 양 행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심을 전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는 이 본문을 읽다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도 다시 살아나지 않았던가? 엘리사를 통해 수넴여인의 죽은 아들도 살아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려고 오다가 도적 떼가 오는 것을 보고 시신을 엘리사의 묘실에 던지자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다시 살아난 사건도 있지 않았던가? 예수님을 통해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베다니의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던가? 어째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하는가?”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와 같이 분명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6명이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다시 살아남은, 앞서 이야기한 다시 살아남과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가 살아났던 나사로는 또 다시 썩을 육체로 부활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시간이 흐르고 다시 죽었습니다. 그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썩어질 육체로의 부활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하늘과 땅, 바다가 있기 전부터, 영원전부터 맨 처음 존재하시고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부활, 신령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만물의 으뜸’, 최고의 자리에 앉으셨음을 나타냈습니다.

4. 화평의 주 되시는 그리스도 (20-22절)
넷째로, 화평의 주 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본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친히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시고, 다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은 ‘화평의 주’라고 불렀습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로 하여금 자신과 화목케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모든 인간이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다시 화평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의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최종 목적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었던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심이었습니다. 21-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탐심과 육체의 정욕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신 최종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의로운 자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화되어 마침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는 완전한 존재로 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매순간마다 자신의 삶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견고하게 믿음에 거하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간직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골로새 교회 안에는 이단들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복음의 소망’이 흔들리던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바울은 견고한 상태로 믿음에 계속 머물고,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23절입니다. “(골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3절을 우리나라 성경으로 보면,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이 두 가지가 따로 해석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 원어를 보면 “견고한 상태로 믿음에 계속 거하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거짓교사들과 이단의 세력에 흔들리지 않도록 확고한 믿음에 계속 거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바울은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과 비성경적인 사상들에 속아서 본래 가지고 있던 확신을 던져버리지 말고,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복음의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거짓 가르침에 속지 않고, 견고하게 믿음에 거하고, 복음의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 받을 것 없는 의로운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구속자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십자가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화목케 하신 ‘화평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세상은 아직도 이 예수를 부인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며, 예수가 구속자 되심을 부인하며, 예수가 창조주 되심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지 맙시다. 견고하게 믿음에 거하고 복음의 소망을 확실히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코너스톤교회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