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2] (전체예배영상) 마가복음 시리즈 (9) 에바다의 은혜 (마가복음 7장 31-37절)

서론. 어느 이민자의 사연…
미국에 이민 온지 얼마 안 되는 한 한국 여성 분이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본인의 실수로 교통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 상대방 책임이에요. 이민 온지도 얼마 안 되어서 새로운 문화에 아직 다 적응한 것도 아닌데, 교통사고까지 당했으니까 너무 깜짝 놀란 거에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경찰차를 기다립니다. 경찰이 와서 질문을 하는데, 이 분이 사실 영어를 잘 못했어요. 그래서 사고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해를 못한 거죠. 때마침 사고를 낸 가해자 남성이 경찰에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을 하고,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고를 정리 했습니다. 상황이 다 끝나갈 때 즈음 경찰이 이 여자 분에게 와서 또 영어로 뭐라고 이야기 하는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아무튼 경찰도 왔고 사고가 잘 접수 되었으니, 이민 온지 얼마 안 되서 이렇게 교통 사고가 나서 기분은 꿀꿀하지만 ‘보험처리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험처리를 하려다 보니까 이 여자 분이 깜짝 놀랐어요. 분명 사고를 낸 사람은 자신이 아니고 상대방 백인 남자였는데, 사고처리 기록을 보니까 자신이 가해자로 되어 있는 거에요. 그 미국 남자가 경찰을 속인 거죠. 결국 여자분은 너무 억울해서 변호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내가 영어만 잘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탠데. 아 영어를 못하니까 이렇게 불편하구나.” 실제로 미국에 이민 온 한국 분들이 이민자로서 살면서 가장 불편해 하는 것이 바로 ‘언어를 통한 소통의 단절’ 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일상 가운데 동네 마트에 가서 장을 볼 때 마트 직원에게 한국말로 하면 간단한 내용을 물어보고 싶어도, 영어가 안 되서 물어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거에요. 또 반대로 계산대에서 직원이 영어로 무언가를 말해줘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어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나 미국 직장에서 일 하시는 분들도, 자기가 보니까 요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은데, 말을 못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지 못해서 좌절 될 때가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더 좋은 방안이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때가 있는 거죠. 영어 못해서 억울한 경우가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거죠. 이처럼 사람이 귀가 있어도 상대방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상대방에게 나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1. 인생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온 사람들
오늘 본문 말씀에 바로 그 답답한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32절 말씀을 봅시다. “(막 7: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는 두 귀가 멀어 안 드리는 사람이고, 언어 장애가 있어 듣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기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말을 듣지도 못하죠,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이나 마음을 전달도 못하죠, 그러니까 이 사람 평생 얼마나 답답한 심정으로 살았겠습니까?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참 불편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 은혜를 받은 것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본인이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를 고쳐달라고 부탁하려고 데리고 왔다는 거에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전국에서 각종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식으로 떠들썩한데, 이 사람은 귀가 들리지를 않으니까 예수가 누구인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을 거에요.
그래서 그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직접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것이죠. 32절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어쩌면 이 사람의 가까운 가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부모, 형제, 자매, 자녀들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이거나 이웃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이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 앞까지 데리고 왔을 정도니까 친한 사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참 이 사람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 혼자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주변 사람이 내 손을 붙잡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와준 거에요.
오늘 설교 듣고 계신 분들 중에도 한 때는 이 사람과 같이 예수와 아무런 상관 없이 살던 분들 계실 거에요.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혹은 이웃, 지인의 전도를 통해 그의 손을 잡고 교회에 와서 예수님 만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귀한 만남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모태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의 부모 밑에서 자란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부터 엄마 아빠 손 붙잡고 교회에 나온 거에요.
이처럼 우리 모두는 본문 속 귀가 들리지 않은 사람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모했고, 예수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그들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의 영혼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들의 차례 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 영적 귀머리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귀가 있으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이전에 내 부모가, 내 친구가, 어떤 전도자가 나의 손을 붙잡고 나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듯이, 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치료법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요청을 들으시고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가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본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대부분 말씀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도 예수님은 단지 그 딸의 손을 붙잡고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나오는 예수님의 치료법은 매우 독특 합니다. 33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막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 이 병든 자를 데리고 가신 후, 주님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사람이 보는 가운데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참, 현대의학으로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왜 예수님은 굳이 이 사람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으셨고, 굳이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행위 자체가 어떤 주술 행위와 같아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후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귀가 멀거나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행하여 병을 고치려고 한 시도들도 수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은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이 행위 자체에 어떤 신비한 주술적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굳이 이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셨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한 사람을 치료하시는 특별한 치유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명하노니 네 귀가 열릴지어다”하고 말씀하셔서 그 사람의 귀가 열렸다고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야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그 말씀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온 세상이 조용했다가 갑자기 한 순간 귀가 뻥 뚫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을 뿐 입니다. 어눌한 입이 고침 받는 것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사람의 두 귀와 입이 고침 받는 것은 오늘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통해 고침 받는 것임을 이 사람에게 증거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이와 같이 두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귀에 두 손을 넣어준 예수님의 손길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이 사람만큼은 “아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다. 내가 고침 받은 그 날 예수님께서 내 귀에 그의 손가락을 넣어 주셨다. 그 날 예수님께서 손에 침을 뱉아 내 혀를 잡아 주셨다. 그로 인해 내 두 귀는 다시 열렸고, 나의 입은 온전해졌다.”하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이 사람에게 부인할 수 없는 치료의 은혜로 찾아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 사람이 경험한 것과 같은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아,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구나?”하고 확신이 드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맞춤형 은혜’ 입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건강하게 살고, 하루에 밥 세끼 먹고 사는 것이 남들 볼 때는 평범해 보이는 것처럼 보여도, 그 누군가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보이고, 우연의 일치라고 보이는 일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라고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 된 사람 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 가운데 이와 같이 내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한 번 떠올려 봅시다. 지금 전 세계에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천 7백만 명 입니다. 사망자는 육십팔만명이 넘습니다. 미국만 해도 확진자 수가 4백 5십만 명이며, 미국 내 사망자는 십오 만명을 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큰 수치의 통계를 봐도 가슴에 잘 와 닿지가 않는 거 같아요. 여러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게 내 가족 중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내 교회 식구들 중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내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지금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당연한 사실처럼 보이고,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르게 보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뤄지는 세상이기에 내 삶에 주어진 모든 축복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가끔 혼자 기도하면서 엉엉 울 때가 있어요. 누군가에게 그 이유를 이야기해 주면 “별 것 아니네 뭐 그런 걸 가지고 울어?”하고 말 할지도 몰라요. 저는 가끔 기도하다 보면 제가 이렇게 오고 싶던 미국에 유학 와서 간절히 기도하던 트리니티에서 공부도 했고, 또 이렇게 죄 많은 사람인데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님의 일을 맡겨주신 사역자로 불러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기도하다가 막 눈물이 나요. 남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니죠.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국제 유학생 숫자가 몇 명인 줄 아세요? 약 100만명이나 됩니다. 한국 유학생은 5만 명이나 되고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보면, “그게 뭐 대수냐?”할지도 모르죠. 근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제 삶에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에요.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이 귀가 멀고, 말이 어둔한 한 사람에게 맞춤형 은혜를 베풀고 계셨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맞춤형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의 눈을 들어 본다면 우리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죠. 내가 살아 숨시는 것조차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충만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3. 기대를 뛰어넘은 은혜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이 두 귀가 멀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부탁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어떤 기대가 있었던 거에요? “비록 저 사람의 인생이 이 세상 그 누구도 손도 못 댈 정도로 비참하지만, 저 나사렛 예수라면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혹은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실제로 이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이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34-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막 7: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4절에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다는 말씀은 그가 이 사람의 괴로움을 보며 가슴 아파하셨다는 뜻 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동정하는 분이세요. 병원 수술대에 누워 있는 어린 자녀가 아파 울며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며, 부모의 가슴은 더 아파 무너집니다. 그게 바로 ‘동정’이죠. 상대방의 아픔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 되는 거에요. 우리 주님의 탄식이 바로 그런 동정 입니다. 이 듣지 못하는 자의 답답함, 말하지 못하는 이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예수님에게 전달 되는 거이죠.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세요. 그분은 우리의 아픔을 치료하실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후 ‘에바다’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공용어인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 입니다. 그런데 ‘에바다’란 단어를 문법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신적수동형 동사’ 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바다’란 말에는, ‘오직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만 열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비참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우리 스스로에게는 없다는 거에요. 오직 하나님만이 닫힌 이 사람의 귀와 입을 열어주실 수 있다는 뜻 입니다. 우리에게 이 ‘에바다’의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제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에바다! 오직 주님만이 제 인생의 닫힌 문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철문처럼 굳게 닫힌 상황을 오직 주님만이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바다’ 입니다.
또한 ‘에바다’는 당시 아람어 사용하던 사람들이 주로 전쟁을 선포하고 시작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에바다’하면 ‘열리라’는 말도 되지만 ‘비켜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에바다’를 외치는 우리 군대를 가로 막고 있는 적군을 향하여 ‘비켜라!’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저 어두운 사탄의 무리와 세상 가운데 ‘에바다’를 선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혜, 새 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 병든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의 반응 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32절에서 보았듯이) 이 귀먹고 말이 어둔 한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32절 다시 한 번 봅시다. “(막 7: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께 이 병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주님 제발 이 사람 좀 고쳐주세요!”하고 간절히 요청한 거죠.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치료해주시자 이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7절 입니다. “(막 7: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친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는 거에요. 이렇게까지 온전하게 고쳐줄 수 있을지는 몰랐어요. 멀어버린 귀와 어눌한 입을 둘다 고칠 수 있을지 몰랐어요. (It was beyond their expectation!)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거에요. 저는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맛 본 자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Amazing!” 우리 주님의 은혜는 늘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습니다. 주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기 때문 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은요,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학생 아들이 이번에 가을 학기에 학교 돌아가는데 아버지인 나에게 용돈 달라고 합니다. “얼마 줄까?” 하고 물어보니까, $1불만 달라는 거에요. 여러분 아버지가 자존심이 있지 정말 $1불만 주겠어요? $100불짜리 꺼내줘야죠. “야, 가서 너만 사먹지 말고, 네 친구들도 맛있는 거 사줘!” 우리 아들 학교 가서 돈 없어서 기죽지 말고, 어깨 당당히 피고 살라고. 그렇게 주는게 아버지 마음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에바다!”, “열려라!” 하시면 우리 앞에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장애물도 다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힘들고 답답한 상황 가운데 놓여 계신 성도님들도 분명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에바다의 은혜’가 있습니다. ‘열지 못할 것이 없는 은혜’입니다. ‘맞춤형 은혜’ 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 입니다. 오늘 이 귀한 은혜를 누가 받았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온 자들이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 앞에 서는 자에게 에바다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삶의 모든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에바다의 은혜’로 해결 되어지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