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6] (전체예배영상) 마가복음 시리즈 (8)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장 24-30절)

서론. 도둑 맞은 빵집 이야기
지난 2019년도 6월 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한 빵집에, 가게 문이 굳게 닫힌 새벽시간에 도둑이 침입하여 돈을 훔쳐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무척 평범해 보이는 이 절도 사건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빵집에 돈을 훔치러 간 도둑은 아무 생각 없이 가게에 있는 머핀 하나를 들어서 먹으며 유유히 가게를 빠져 나가려 했습니다. 가게 문을 나가려던 도둑의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빵이 입맛에 맞았는지 다시 돌아와서 머핀을 더 골라갔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쇼케이스의 케이크들을 이것 저것 먹어보더니 케이크를 가져 갔습니다. 그렇게 도둑은 장작 4시간 동안 이 빵집에서 디저트를 먹다가 드디어 돈통을 털어갔습니다. 다음날 범인을 잡기 위해 CCTV를 확인하던 가게 주인과 경찰은 CCTV 영상을 보다가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빵 집 주인은 이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공개 했습니다. 그러자 이 영상이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도대체 도둑의 마음을 홀린 그 빵의 정체가 무엇이냐? 무슨 맛이냐?’하고 관심을 가진 네티즌들이 가게를 찾기 시작 했습니다. 도둑이 먹은 빵을 찾아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급격히 많이 증가하자, 주인은 도둑이 먹은 빵들을 하나로 모아서 ‘장발장 세트’를 만들었습니다. 도둑 맞은 집이 의외의 결과를 맞이하여 가게가 대박 난 거죠.
이와 같이 우리 삶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어제는 잘 나가도 오늘 갑자기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고, 반대로 어제는 죽을 것 같은 위기였는데, 오늘은 또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성경에 기록된 또 하나의 반전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삶에 찾아온 큰 위기 가운데 오히려 큰 은혜를 받는 반전을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 이 본문 속 담겨 있는 주님의 은혜가 현재 인생의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도 동일한 은혜로 다가가기를 축복합니다.

본론.
본문 속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두로’라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예수님께서 주로 머무시고 사역하셨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55km (약 35mile) 정도 떨어진 곳 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바쁜 일정 가운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또 앞에 있을 많은 사역들을 준비를 위한 숨고르기를 하기 위한 장소로 이방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두로를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능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머무는 곳을 숨기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발견하였고 또 다시 수많은 병자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병든 자들을 능히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두로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과연 이 여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25-26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먼저 26절 말씀을 보니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이 여인의 국적이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것은 그녀가 인종으로는 시리아 지역의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것이죠.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수로보니게 족속, 즉 시리아 지역의 페니키아 출신 사람들은 예로부터 굉장히 자긍심이 높은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상 무역을 통해 큰 부를 누리며 잘 살다 보니까 도도하고 콧대가 높은 사람들 입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도 어쩌면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합니다. 자, 이와 같이 돈도 많이 벌고, 부유하며 삶의 아무런 걱정거리나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왜 두로에 계신 예수님을 찾기 위해 왔습니까? 그녀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린 것이죠.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봐도 귀신을 쫓아 낼 수 없자, 예수님께서 능히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잘 상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하고 한 상에서 식사도 하지 않을 만큼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들은 사람 취급하지 않고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얼마나 재수가 없는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이방인들도 웬만하면 유대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꺼렸던 시절 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방 여인이 직접 찾아온 오늘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로운 모습 입니다. 게다가 그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을 것입니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했다고요? 그녀의 딸이 더러운 귀신 들렸습니다. 아무리 손을 써봐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큰 문제를 만난 것이죠. 애지중지 키워온 딸 아이가 더러운 귀신들려 헝클어진 머리로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고, 제정신이 아닌데 돈이 많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딸 걱정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에요. 밥을 먹어도 이게 코로 들어가나 입으로 들어가나 몰랐을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사는게 사는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 지금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께 살려 달라는 거에요.

삶의 고통과 문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다가가게 한다.
만일 이 여인에게 이런 삶의 고통이 없었다면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도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아픔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아무리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려보고, 주먹으로 땅을 쳐봐도 풀리지 않는 이 답답함, 어디 가서 해결 받겠습니까? 빈 병을 눈물로 가득 채울 만큼 울어보고 또 울어 본들 그 누가 이 슬픈 마음을 알아 주겠습니까? 삶의 고통 앞에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혹시 지금이 우리 삶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닐까요? 바야흐로 전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 시대를 겪고 있는 것이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직장을 잃은 사람이 4천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4천만명이란 숫자가 얼마나 큰 숫자인가 하면, 대한민국 국민 수가 대략 5천 2백만 명 즈음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 전체 수에 맞먹는 인구가 직장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엄청난 숫자인 거죠. 한 사람이 직장을 잃으면, 그 한 사람만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양하는 가족들과 자녀들에게도 어려움은 함께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미국에서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처해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가장 최근에 발표된 자료를 보면 미국에 사는 사람 10 명 중에 7.8명이 ‘Living paycheck to paycheck’ 입니다. 이번 달 직장을 잃어버리면, 당장 다음 달에 먹고 살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10명 중 약 8명에 해당한다는 거에요. Credit card 빚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경제적 어려움에 어디서 돈을 구하나 마음만 분주합니다. 매일 아침이면 학교나 도서관 혹은 공공 시설 앞에서 나눠주는 공짜 아침을 받아가기 위해 수많은 차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 입니다. 실업률이 지난 20년만에 최고치에 달했습니다. 청년들은 흔했던 알바 자리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직장인들은 불과 몇 달 전에는 상상도 못한 해고를 당하고,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한산해진 길거리에 가게마다 문을 닫고, 폐업하는 곳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가게 주인들도 이를 악 물고 버티고는 있습니다만,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의 이야기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모르게 땅이 꺼지도록 한숨 짓고, 내일만 생각하면 가슴은 답답하고, Table에 쌓여가는 Bill을 보며 뭐 그리 세상에 돈 내라고 하는 곳이 그리 많은지? ‘이렇게 힘든데 누가 날 도와줄까? 어디 날 도와줄 사람 없나?’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누가 우릴 도와주겠습니까? 오늘 자신의 삶의 문제와 애환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온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내 필요를 주님께 아뢰십시오. 찬송가 가사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시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참 소망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와 같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통과 눈물 속에서 예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에는 없는 장면이 병행본문인 마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함께 말씀을 봅시다.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오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여!’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을 부른 호칭은 기가 막힌 고백 입니다. 먼저 그녀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 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후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셨죠.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예의를 표하기 위해 그 분을 ‘master’ (헬라어-에피스타테스)로 불렀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차원으로서 ‘주여’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러나 그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하고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Lord’ (헬라어-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퀴리오스’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존경의 차원을 뛰어넘어, ‘지금 내 앞에 계신 당신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하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을 호칭한 단어가 바로 퀴리오스 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가 바로 ‘주’라는 호칭 다음에 나오는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호칭 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 성경에서 오시리라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는 호칭 입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는 구약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온전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예수가 바로 나와 내 딸을 구원할 메시야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여인과 같이 나사렛 예수가 바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이 세상의 사망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실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는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을 보니 이 여인은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와서 엎드리고 크게 소리 지르며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지금 내 사랑하는 딸 아이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습니다. 마가복음 7장 25절을 보면 저자는 이 여인의 딸에 대해 기록하며 ‘어린 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설명할 때 쓴 바로 그 표현 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열 두 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도 그 나이 즈음 되었을 것입니다. 즉 이제 국민학교 갓 졸업하고 중학교 들어갈 정도의 아주 앤된 얼굴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워온 내 딸, 세상 천금 만금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내 딸이 더러운 귀신 들렸습니다. 정신병자처럼 소리를 지르고, 헛소리를 하며, 친구들에게는 손가락질 놀림 받고, 동네 아이들도 보면 돌을 던지거나 조롱합니다. 애엄마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지금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을 좀 고쳐달라고, 아니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어머니의 기도 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간절한 기도가 또 어디 있을까요?
지난 2003년도 2월 18일 대구에서 일어난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날 시커먼 연기가 대구 시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환풍구와 역사 입구마다 계속해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습니다. 50대 정신지체 남자가 플라스틱 병에 든 휘발유를 전동차 바닥에 뿌린 뒤 라이터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 사고로 이 날 무려 192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약 150명의 선량한 시민들이 크게 다쳤습니다. 무려 17년전의 일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쓰면 안 됩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는 세월이 지날수록 그 가슴 속 빈자리가 더 커지는 법입니다. 이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 가운데 무남독녀, 외동딸을 잃은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서른 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딸을 본 최이식이란 분입니다. 이 사고로 딸 혜경이가 죽었습니다. 이 아버지 하는 말이,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종일운다는 거에요. 밤새도록… 왜요? 불타는 지하철에서 죽은 딸 혜경이를 생각하면 눈에서 울음이 멈추질 않는다는 거에요. 사고가 난지 17년이 지나도 여전히 눈물로 삽니다. 그게 부모 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 하잖아요. 부모에게 자식이란 그의 전부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있어 딸은 그녀의 전부 였습니다. 오늘 본문 속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소리 질렀습니다. 여러분 그 목소리를 한 번 상상해 보시겠어요? 한 마리의 총맞은 짐승처럼 부르짖고 있는 거죠. 이 어머니는 너무나도 간절했어요. 예수님 말고는 이제 도움을 청할 곳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이 절망과 아픔 뿐인 세상 가운데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 되심을 고백할 수 있는 이 귀한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길 원하신다.
이와 같이 간절하게 기도하면 예수님 들어주실 법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27절 말씀 입니다.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3년 반이란 정해진 시간 속에서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던 사역의 주된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사역의 우선순위가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5장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 여인에게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 우리의 두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뭐라고 부르셨어요? ‘개’라고 부르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하여 ‘개’라고 부르신 것이죠.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것은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개’이다”라고 해석하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만, 사실 ‘들개’이던 ‘애완용 개’이던 사람을 ‘개’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기분 나쁜 말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이 여인을 자극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 속 태도와 자세를 점검하고 계신 것이죠. ‘정말 그녀의 믿음이 진실한가?’, ‘그녀의 믿음이 굳건한가?’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한가지 느끼게 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당장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간절한 기도일수록 더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볼 때는 지금이 기도 응답해 주실 적기인 것 같은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처리되는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국이 한 때 전 세계에서 인터넷 속도가 제일 빠른 나라였다는 것 알고 계세요? 지금은 더 빠른 나라들도 생겨났습니다만, 여전히 최상위권 입니다. 모바일 데이터 속도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빠른 것을 선호하거든요. 한국은 배송도 빠릅니다. 어제 밤에 인터넷에서 상품 주문해 놓고 잠들면, 오늘 새벽에 아파트 문 앞에 배송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중국집에 짜장면 시켜놓고 5분도 채 되지 않아서 “왜 안 와요?”하고 전화하는 게 한국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한국인의 3대 뻔한 거짓말 중에 하나가 중국집 사장님이 ‘출발했어요’라는 거에요. 손님들이 하도 많이 물어보니까 이런 우스개 소리가 생긴 거죠. 우린 뭐든지 빠른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우리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거에요. 기도하고 나서 얼마 못 가서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 주문한 지가 언젠데 왜 안 와요?” 기다리는 시간이 짧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 이거 빨리 해결해주십시오!”, “하나님 빨리 고쳐주십시오. 빨리 응답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때가 많지 많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빨리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더디게 이뤄지는 것일까요? 답을 드리기 보다 이 세상에서 기도 응답을 가장 오래 기다린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을 해결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기도 응답을 가장 오래 기다린 사람 누구일까요? 저는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흔 다섯의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깁니까? 아니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의 아내 사라가 입덧 한 번 한적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이 참고 또 참았을까요? 이삼십대 젊은이면 말도 안해요, 아브라함은 칠팔십대 노인 입니다. 어찌 기다리는 것이 쉬웠겠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오늘은 나하고 하늘에 있는 별을 한 번 세보자구나.” 아브라함은 별을 세기 시작합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다섯 나 다섯, 별 여섯 나 여섯… “하나님 별이 너무 많아서 이거 다 세다 가는 제가 늙어 죽겠습니다.” “그래? 아브라함아? 내가 너의 자손을 이 별의 숫자처럼 능히 셀 수 없을만큼 만들어 줄께!” 여러분이 만일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팔십대 노인이 된 나에게, 여전히 자녀가 하나도 없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주셨다면 그 믿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그러나 셩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5-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도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시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는 마침내 100세가 되었을 때 믿음의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해결되고, 빨리빨리 응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기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믿음이 진실한가? 믿음이 굳건한가?’ 시험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 속에 믿음이 진실한지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오래된 간절한 기도를 하시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기대하며 기도하고 기다리자” 기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믿음이 진실한가 보기 원하셨던 주님께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 했습니다. 28절 입니다.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네, 주님 맞습니다. 저는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보잘것없는 이방 사람일 뿐 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단단히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끝 입니다. 내가 이방 사람이긴 하나, 나 역시 천지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너무나도 멋진 고백 아닙니까?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은 드디어 29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막 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기서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대로 말했다!”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대답을 통해 비록 자신이 이방사람이지만, 그 역시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그녀의 굳건하고 진실된 믿음을 보셨습니다.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말씀하시자, 그녀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집에 찾아가셔서 안수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예수님께서 그녀의 딸이 고침 받았다는 치유의 선포를 하셨을 뿐 입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권세를 통해 멀리서도 말씀으로 자신의 딸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대로 딸을 괴롭히던 귀신은 나갔고, 그녀와 딸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론.
우리의 삶에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어떤 고통들이 찾아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예수님 찾아올 이유가 있었을까? 예수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 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기록하며 “보라(헬라어-이두!)! 한 가나안 여자가 나왔다!”고 놀라움을 표현하며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영어 EVS 성경을 보면 Behold!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저자도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아니 이 이방 여자가 왜 예수님 앞에 나왔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큰 고통과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왔고 주님의 크신 능력까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지는 않지만, 이 기적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딸이 고침 받는 사건으로 인해 이 여인의 일가친척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다.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어진다면 충분하다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끝까지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아,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에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려고, 그 때 내게 그런 시련과 시험을 주셨구나?”하고 고백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 입니다. 우리 모두가 삶의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의 크신 은혜를 기대하며,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일하심과 응답하심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