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9] (전체예배영상) 마가복음 시리즈 (7) 오병이어의 기적 (마가복음 6장 30-44절)

지난달 6월 23일 LA Times는 미국의 어느 한 한인이민가족의 사연이 기사로 소개 되었습니다. LA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대학생 Hannah Kim의 가족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사연인즉, 헤나씨 일가족 모두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지난 4월 함께 할머니와 아버지 두분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진단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요양원으로부터 감염된 것으로 보이고,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환자로부터 감염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감염되자 헤나씨의 어머니, 그리고 17살 남동생까지 가족 모두에게 전파 되었습니다. 85세가 되신 그의 할머니와 68세의 아버지는 둘 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숨졌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코로나에 감염 되었는데요. 중환자실에 머물다가 회복은 했으나 폐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폐 이식 술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죠.
헤나씨의 가족을 돕기 위해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일어났는데요. 딱한 사연이 전해지자 지금까지 약 51만 달러라는 큰 금액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기사를 보면서 한 가지 흥미롭게 본 대목은 대학생 헤나씨와 그의 고등학생 남동생이 자가 격리 중에 있어 바깥 출입을 못할 때 일어난 일 입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도 폐가 심하게 손상되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두 남매도 코로나에 걸려 밖을 나갈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 입니다. 그 때 누가 이 아이들을 도와주었는가 보았더니, 교회 분들이 도와주었다는 거에요. 모금을 위해 제작된 홈페이지에 업로드 된 글 중 영어 문장 하나만 발췌해서 읽겠습니다. “Church members have created an amazing meal train, bringing food and essentials to Hannah and Joe while they were quarantined.” 아무도 돌봐줄 부모가 없고 집에 격리되어 갇혀 있는 이 두 남매에게, 그들의 교회 식구들이 요일마다 담당자를 정해서 매일 같이 먹을 것과 생필품을 공급해 주었다는 거에요.
저는 이 기사를 보며 무릎을 쳤습니다. “This is exactly what church should do! 그래 이게 교회지. 코로나로 인해 다들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힘을 같이 하여 섬기고 헌신하는 자들의 모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참된 모습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참 감동적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1. 시험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을 확인하심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환난 당한 자들, 굶주린 자들, 헐벗은 자들을 돕는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이 많은 무리를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도와줄 수 있을지 관심 있게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좋은 목자는 양에게 양질의 꼴을 먹이고 싶어 하듯이,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이 방황하는 이 수 많은 양 무리에게 좋은 꼴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자신과 같은 삶을 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파 굶주린 상황 입니다.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도 자신들이 여력만 된다면 정말 어떻게 해서라도 돕고 싶었을 거에요. 그런데 먹여야 하는 인원이 꽤 많습니다. 제자들 앞에 앉아 있는 굶주린 사람들의 숫자가 몇 명입니까? 성인 남자만 세어 보니까 5천 명 입니다. 여성과 아이들의 숫자를 더했더라면 최소 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기가 막혔습니다. “아니, 예수님 우리가 어디 가서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겠습니까?” 큰 인원이 적은 인원을 돕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열 두 명 밖에 안 되는 인원이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장면은 마치 낚시를 하러 간 아버지가 자기의 어린 아들에게 고기를 잡아서 주는 것보다 고기를 잡는 법을 직접 가르쳐 주고 있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낚시 바늘은 무엇을 쓰면 좋을까? 미끼는 무엇으로 쓰면 좋을까?” 아버지는 정답을 다 알지만 아들에게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에게 질문을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어보셨습니다. 문제를 바로 해결 해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싶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곧바로 주판의 알을 옮기기 시작하고, 머리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계산해 본 결과 답은 불가능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입니다. 따라서 200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33주간 또는 8개월 동한 일한 임금을 말합니다.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서 오늘날 노동자가 하루 일해서 $100불을 번다고 할 때 200 데나리온은 약 2만불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 친교 한끼 식사를 위해서 흔쾌히 $2만불 헌금하실 분 계십니까? 제자들의 수중에는 이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만약에 이백 데나리온의 헌금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지금 광야 한 가운데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만한 빵을 공급해 줄 빵 가게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날 모인 이들의 숫자를 성인 남자만 5천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인원수를 헤아림에 있어 어린아이와 여자를 제외하고 성인 남자만을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이 들판에는 적어도 만명 이상의 인구가 앉아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서는 2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추측해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오늘날과 같이 대형마트가 있는 시대에도 월마트, 타겟, 코스코에 들어가서 2만불을 줘도 2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위한 넉넉한 빵을 구매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큰 Mall이나 Mart 하나 없는 2천년 전 갈릴리 바다 건너편 빈 들판에 모인 수많은 이들을 위한 빵을 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제출한 보고서의 결론(The bottom line)은 “It’s impossible” 이었습니다. 37절 말씀 읽겠습니다. “(막 6: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주님, 이 사람들에게 빵을 한입씩 먹이려 해도 최소 2만불이나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설령 그만한 돈이 있다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만큼의 빵을 살 곳도 없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눈으로 목격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믿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눈 앞에 닥친 문제 앞에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하다 못해 “주님, 주님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가 볼 때는 이러이러해서 안될 것 같습니다만, 주님께서는 능력의 주님이시니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이런 자세조차 없었습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부탁하거나 예수님을 의지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삶의 문제를 머리로만 해결하려는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자신의 삶에 역사하시는 주님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자신이 가진 것이 모자라다 생각했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주님께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실 것인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전에 이 문제를 그의 제자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해결 할 것인지 시험해보고자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이란 죄를 짓게 하려는 시험이거나, 낙담하게 하려는 시험이 아닙니다. ‘시험’이란, 사람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그에게 앞으로 사역 가운데 맞닥뜨리게 될 여러가지 환난과 문제들을 그의 지식이나 계산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는 것이라는 영적 교훈을 주시기 위한 기회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 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삶에 찾아온 이 코로나 사태도 그 누군가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시험 기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찾아온 이 위기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심
오천명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수중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3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을 보면 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러니 떡이 많아봐야 얼마나 얼마나 많고, 물고기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작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일 수 있을지 참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지만 한 번 주님께 드려보자, 그리고 그 다음은 주님께 맡겨보자 하는 믿음과 행동은 결국 큰 표적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주님께 드린 도시락 반찬을 한 번 살펴볼까요? 먼저 보리떡 다섯 개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당시 유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빵은 밀 빵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보리로 만든 빵은 집안 형편이 어렵고 가난한 자들의 주식이었습니다. 보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식량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날 먹을 것이 없어 먹던 쌀밥 대신에 먹은 밥이 무슨 밥이에요? 바로 보리밥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도시락을 드린 이 어린 아이도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이 도시락에는 보리빵 다섯 덩이와 함께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이 밥을 먹던 양식을 살펴보면, 이것은 자반고등어처럼 소금에 저려 놓은 것이나 숯불에 구운 물고기였을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물고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익투스”라고 되어 있는데요,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읖사리온”이란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이는 크기가 크지 않은 작은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아이가 먹을 도시락이었으니 그의 어머니가 크기가 아담한 자반 생선 두 마리를 도시락통에 넣어 준 것이죠.
마가복음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 중 안드레는 예수님께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님,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한 어린이가 준 보리빵 다섯 덩이, 조그만 자반생선 두 마리 입니다. 주님 그러나 이러한 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이 안드레의 질문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과도 비슷합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수많은 문제들 앞에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주님 제가 겪고 있는 이 오래된 질병 앞에서 이 작은 믿음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작은 몸으로 무릎 꿇는 것 밖에 없는데, 그것이 내 가정에 찾아온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얼마나 큰 해결책이 되겠습니까?” 안드레의 질문처럼 우리들도 내가 가진 것이 형편 없어 보이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힘이 없음에 낙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오늘 기적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올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작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놀랍게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의 손에 붙잡힌 막대기를 기억하십시오. 광야에서 양을 치던 평범한 막대기였으나, 하나님께서 사용 하시자,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는 위대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의 손에 들린 물맷돌을 기억하십시오. 그 역시 양을 칠 때 사용되는 일상적인 도구 였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자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세상 볼 때는 특출난 것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능력의 도구로 변화 됩니다. 하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사용된 두개의 나무 조각과 3개의 못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도시락이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라 했습니다. 어린 아이 한 사람이 먹을 정도 크기의 보리떡 다섯 개, 그리고 그 다지 크지 않은 물고기 두 마리 입니다. 가난했던 어린 아이가 주님께 드린 음식은 얼마나 초라한 도시락이었습니까? 어린 아이도 처음부터 5천명을 먹일 생각으로 예수님께 도시락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루 종일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열심히 사역 하시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비록 작은 도시락이지만 이거라도 드려야겠다.” 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기의 도시락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성숙한 어린이 입니까? 이 도시락을 주님께 드리면 당장 이 소년도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배에서도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가 먹으라고 정성스럽게 챙겨 주신 도시락… 어쩌면 그 도시락은 그 가난했던 소년이 가진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년은 비록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비록 부잣집 도련님이 먹을만한 풍성한 산해진미가 담긴 도시락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조그마한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년의 작은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그 작은 헌신을 통하여 성인 남자만 5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성인 남자가 무려 5천명이나 되었지만, 이 소년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 빵 한 조각 가져다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필요는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몸으로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5천명이 모였는데 그 중에 먹을 것 있는 사람이 한 두 명은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그 가운데는 이 소년이 예수님께 드린 도시락보다도 더 양질의 식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잘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중 첫째는 주님께 드리면 자신은 굶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도시락을 드리면 자신은 먹을게 없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침만 삼켜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부서나 사역을 섬겨야 할 필요는 눈에 보이는데, 이거 하면 내 시간 빼앗기고, 내 에너지 써야하고, 내 물질도 써야하기 때문에 선뜻 헌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섬기는 것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힘도 들고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그것들을 섬기고 헌신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의 헌신을 받으시고 그에게 감당할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의 특정한 부분, 구체적인 사역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역만 생각하면 자꾸만 내 마음에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의 현장으로 부르실 때, “나 저거 하면 안된다. 나 시간 없다. 나 힘 없다. 나 재능없다.” 이렇게 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 두려움을 뛰어넘어 섬겨야 합니다. 감당할 힘이 없어도 섬다 보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섬길 재능이 좀 부족해도 열심히 섬기다 보면 하나님께서 또 감당할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섬기는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납니다. 책임지는 자리, 헌신하는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더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 사는 것이 자녀로 사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책임질 것도 많고, 헌신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모가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고 헌신할 때 자신의 삶이 성숙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섬길 때,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이 있어 책임지고 헌신할 때 우리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 집니다.
사역을 하기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작은 자의 헌신을 통해 큰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재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까지 작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중심에 담겨진 믿음을 보십니다.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부족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어른이 먹어도 배부르지 못할 어린 아이의 도시락일지라 할지라도 주님께 헌신하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고,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큰 일들을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우리 안에 있어도, 우리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것은 작게 보고 큰 것은 크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은 사람이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것도 작게 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볼 때는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크게 보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어린 소년의 한 끼 식사였을 보잘것없는 도시락이었습니다. 큰 무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은 그것을 예수님께 드린 이 어린 아이의 섬김과 헌신을 기억하십시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과 사람들을 위해 아낌 없이 바친 어린 소년의 고귀한 희생과 섬김의 마음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삶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용하시는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만일 오늘 본문에 어린 소년이 예수님께 도시락을 가져다 드리지 않고, 혼자만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 소년만 배부르게 먹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재능, 시간, 에너지, 물질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이 어린 소년이 예수님께 자신의 도시락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님께 드렸을 때 도시락은 남자 오천명, 그리고 그 외에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는 도시락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가진 도시락도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 수중에 하나 밖에 없는 도시락일지라도, 비록 맛있는 반찬이 많지 않은 고작 보리떡 밖에 없는 도시락과 같은 내 삶 일지라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 교회 일 하다 보면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나 한 사람의 헌신으로 무엇이 달라지겠어?” 그러나 성경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기적을 만드셨습니다. 작은 헌신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많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해변가에 세워진 등대의 불을 피우는 일이란 것이, 그 다지 큰 일은 아닙니다. 단순합니다. 불만 피우면 끝입니다. 그러나 그 불 빛을 보고 많은 배가 안전하게 항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등대지기의 작은 헌신이 많은 어두운 밤 바다의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헌신을 강제로 요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발적인 헌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마음에 섬기라는 감동을 주실 때 뒤로 물러나지 마시고 주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작은 것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심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 본문의 장면을 한 유명한 화가가 새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을 가지고 그림으로 그렸다고 한 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어떤 그림이 그려졌을까요? 어쩌면 빈들에 앉은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인상을 쓰고 있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배고픔과 허기진 이들의 표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큼은 온유하고 점잖은 표정으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표정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표정입니다. 4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막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축사하셨다.”라는 이 말은 헬라어로 “율로게오”라는 단어로 ‘찬송하다’란 뜻 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모두 이와 같이 “율로게오”를 사용했습니다만, 요한복음을 보면 이 “율로게오”라는 단어 대신에 “유카리스테오”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감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입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두 손에 들고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신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상황이 꼬이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이들은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도 가정 안에도 또한 교회 안에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인상 쓰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감사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감사가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합니다. 감사가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한 분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감사는 이제 이 자리에 앉은 배부른 수 많은 이들의 감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감사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1-44절 말씀입니다. “(막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막 6:42) 다 배불리 먹고 (막 6: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막 6: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앞서 제자들은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빵을 한 입씩 먹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빵과 생선을 나눠주는데,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주었습니다. 배가 많이 고픈 사람들에게는 많이 주고, 더 원하는 사람에게는 또 더 나눠주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 이 빈 들에는 남자만 5천명, 20세 미만의 어린 아이와 여자까지 합하면 대략 만 오천에서 2만명 사이의 군중이 앉아 있습니다. 42절 말씀을 보니, 그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한 입씩만 먹은 것도 아니고 다 만족스럽게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게다가 모자라지 않고, 남은 것까지 있어 남은 것을 거두어 보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왜 열두 바구니가 있었을까요? 이 당시 유대인들은 여행시에 필수품을 들고 다니기 위해서 바구니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여행자들이 등에 매고 다니는 Backpack과 비슷한 용도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거두어 담아 가지고 오라고 하셨을 때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매고 다닌 바구니를 사용해서 남은 음식을 거두어 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열 두 제자들은 열 두개의 “Souvenir” 기념품을 품에 안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 날 열 두 바구니에 남은 빵과 물고기는 누가 먹었을까요? 아마도 바구니를 매고 간 제자들이 나누어 먹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이 빵과 물고기를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모든 기적이 일어난 후 바구니를 품고 있는 제자들의 표정을 한 번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빵으로 가득찬 바구니를 보고 이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을까요? 이처럼 예수님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았습니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기적을 함께 겪은 수많은 이들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좋은 날, 모든 것이 잘 나갈 때 감사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때에 감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법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가 모든 문제의 해결이고 시작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인상을 쓰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처럼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위기를 기회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오병이어 사건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빈 들에서 굶주린 수 많은 무리들에게 또 다른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서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 곧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위기로 시작했습니다. 빈 들, 광야,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장소, 굶주린 백성들, 가진 것이 없는 제자들, 문제 앞에 무능력한 제자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위기를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는 놀라운 복음 전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 삶 가운데도 여러가지 위기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그 위기들을 다 헤쳐 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 그리고 환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여 드림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머무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