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7] (전체예배영상) 마가복음 시리즈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2장 23절 -3장 6절)

사람에게는 누구나 ‘쉼’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육체적 쉼과 정서적 평안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이 쉼 없이 계속해서 숨가쁘게 일만하고 살아가다 보면, 정신적으로 불행함을 느끼게 되고, 또한 육체적으로도 병 들기 마련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유명한 말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만 보아도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참 된 쉼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고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쉼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신 후 7일을 복 주시며 안식일을 재정 하셨습니다. 본래 안식일이란 말은 ‘완성하다’ 혹은 ‘쉬다’란 뜻이 있습니다. 이는 안식일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된 쉼을 통해 영적, 육체적 재충전을 하는 날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참된 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망각한 채 안식일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구속하는 밧줄처럼 적용 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준수에 지나친 확대 해석을 통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도 없는 이상한 규칙들을 정하여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 안식일은 완전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재 속에서 참된 자유와 쉼을 누리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 해석을 두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실천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를 고집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을 위한 안식일
어느 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나아가시도록 길을 만들기 위해서 추수기에 이른 곡식을 잘랐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 입니다. “(막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2장 1절을 보면 제자들이 때마침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절에 ‘길을 열며’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이삭을 손으로 꺾기도 하고,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 것은 예수님께서 편히 앞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만들어 준 것을 나타냅니다. 이 둘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또한 자신들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밀밭의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죠.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경악 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밀밭에서 손으로 헤쳐나가며 길을 만들며 이삭을 먹은 것은, 마치 추수 때 낫을 들고 곡식을 경작한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며 제자들은 안식일에 일한 것이라고 판단 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볼 때 제자들은 일하는 것이 금지된 안식일에 노동을 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한 죄인들인 셈 입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바리새인들은 이 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책망하기 위해, 예수님께 항의하듯 말했습니다. 24절 입니다. “(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인간에게 참된 쉼을 주려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의 참된 의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이 날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여부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몹시 흥분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식일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이 이들에게는 몹시도 불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왜 당신들의 제자들은 안식일 규례를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듯 질문 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꼬투리를 잡기 위해 던진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역사적 사건을 하나 꺼내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이야기였습니다. 25-2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막 2: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과 그의 일행은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가는 길에 하나님의 전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급하게 도망친 바람에 밥도 제 때 먹지 못했던 다윗은 매우 시장하여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침 이 때 하나님의 전 안에는 하나님께 바친 빵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진설병이라 부르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 구워 바치는 빵이며, 율법에 의하면 이 빵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이 진설병을 몹시도 굶주린 다윗과 그의 무리가 먹을 수 있도록 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윗 왕 이야기를 꺼낸 것은 유대인들이 다윗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존경해 왔기에 아무리 바리새인들이라도 다윗에 대한 반론을 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윗이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율법이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금했던 빵을 먹음과 같이,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보다 더 큰 왕 되시는 예수님께서 굶주린 제자들을 안식일에 먹이신 이 사건이 결코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으심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그림자 역할을 담당했던 다윗이 성막에서 율법이 금했던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다면,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금지된 규례를 행하는 것은 더욱 거리낄 것이 없는 셈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 외엔 금지된 진설병을 먹은 다윗 왕 이야기를 하자, 바리새인들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윗 왕이 가진 위치는 너무나 특별하여 다윗을 잘못 비난하면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문 바리새인들은 분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도 기록되지 않은 안식일에 관한 세부 규정 39개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인위적인 규례들을 예수님에게도 짐 지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시도를 완강히 부인하시고,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27절 말씀 입니다. “(막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에게 육체적 쉼과 영적 재충전의 시간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을 허락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잃어버리고 오직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식의 율법준수만이 안식일의 주된 목적이라고 잘못 받아들이고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사회적 약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의 근본 취지는 버린 채, 오직 법규만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가리키시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 해주셨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처럼 배고픈 다윗은 제사장들의 진설병을 먹음으로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뛰어넘었습니다. 다윗이 제사장들의 진설병을 먹었으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위배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록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이었으나, 배고픔을 느낀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내어주는 것도 허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의 근본 정신이 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임을 강조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입니다. 이따금씩 신앙생활을 한다는 명분으로 가정을 뒤로 하거나,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등한 시 하는 분들을 보기도 합니다. 가족들은 밥도 못 먹고 굶주리고 있는데, 자신은 하나님과 교회 일을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일 보다 사람이 먼저 입니다. 이 점을 잊어버리면, 마치 사람을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소모품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 생각하며 밤낮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지만, 혹 바리새인들처럼 우리의 지나친 열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를 봅시다. 28절 입니다. “(막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의 끝없는 안식일 논쟁을 결론 짓기 위해 하신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준수에만 목숨을 걸고 열심을 내었으나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참된 ‘쉼’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사람들을 정죄하고 억압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참된 ‘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 입니다.

2.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안식일
이후 또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손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의 신체가 마치 딱딱하게 메마르고 굳어진 나무처럼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의 직업은 석공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쇠망치를, 다른 한 손에는 정을 들고 돌을 깎아내리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 사람의 손이 불구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좌절이었을까요? 음악가라면 두 귀가 먼 것과 같고, 미술가라면 두 눈이 먼 것과 같은 좌절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승을 보면 이 사람은 손이 마른 후 직업을 유지할 수 없어 구걸하며 살아가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자 자신의 손 마른 병에 대해서 고쳐줄 것을 간절히 간구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저 사람을 고치실 것인가?’ 보기 위해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3장 1-2절 입니다. “(막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관심은 그 동안 손이 말라 힘들게 고생하고, 삶이 망가지고 마음 아파하던 사람이 다시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준수하냐 안 하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이 대목이 얼마나 섬뜩하게 보이는 지 모릅니다.
한 번 이런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주일날 교회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한 유치원생 어린아이가, 오후에 교회에서 부모를 기다리며 친구들과 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는 선생님과 친구들 몰래 교회 주차장으로 나갔습니다. 한참 주차장에서 놀고 있는데, 뒤로 후진하는 차가 키가 작은 아이를 보지 못하고 그만 아이를 넘어갔습니다. 아이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자식이라 생각해 봅시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병원에 달려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옆에서 같은 교회 성도님들이 쳐다보며 ‘저 집사님, 평상시 믿음이 대게 좋아 보였는데, 어디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도하고 버티는지 아니면 믿음 없이 병원 데리고 가나 보자…’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섬뜩합니까? 정말 인간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 없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 준수’라는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져,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살리려고 제정하신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만일 예수님께서 이 ‘손 마를 자’를 고치기만 하면,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고소하고 정죄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죽어가는데,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안식일을 지키느냐 마느냐’에만 관심이 있는 이 율법주의자들은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시간을 통해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참 된 의미를 가르치시는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3-4절 말씀을 봅시다. “(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지금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가운데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손 마른 자의 병 고치는 기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시며 전혀 위축된 모습 없이 당당하게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특별히 4절 말씀은 안식일에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정신을 잘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기 위해 제정 되었고, 안식일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입니다. 단순히 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안식일의 핵심요소가 아닌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 정신에 따라 이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함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대적들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항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손이 마른 자는 손이 굽어 있어 완전하게 손을 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그의 마른 손은 완전히 치유되었고 그는 주님께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장면을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선을 행하시고 무엇보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손 마른 자와 같이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회복되어 주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형식만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고 예배도 드리지만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나와 이웃들의 삶에 회복이 일어나고, 생명력이 넘쳐나고, 참된 기쁨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나와 이웃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생활
안타깝게도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형식적 율법주의를 고집 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영혼이 말라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보시며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으로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연약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치유하는 실천적인 삶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것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기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삶에 참된 보람과 만족 그리고 행복을 주십니다. 안식일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기쁨을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며, 이웃들의 필요를 사랑으로 채우는 날 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