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전체예배영상) 성경인물 시리즈 베드로 (5) “베드로, 예수를 닮다” (사도행전 9장 32-43절

서론. 스승을 닮아간 제자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 그는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고기잡이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인생의 실패자처럼 살아가던 베드로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지난날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일, 세 번 부인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질문에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한 번 베드로를 사역의 현장으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완전히 실패했던 제자 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그를 찾아오셨고, 또 다시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 했을까요? 그는 이번에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을까요? 또 다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 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베드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란, 그의 스승을 닮아가는 사람 입니다. 스승의 말투와 행동 심지어 걸음걸이까지도 하나하나 닮아갑니다. 점점 선생님과 비슷해지는 것이죠.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중풍병자를 치유한 베드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베드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는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복음을 전파 했습니다. 32절 말씀을 한 번 보십시오.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여기서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란 말은 단순히 동서남북 사방의 지역을 반문했다는 수준의 의미가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베드로가 ‘모든 지역을 관통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도 빠짐없이 찾아가 방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의 수많은 마을들을 돌아다녔을 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유대인들이 잡아갈까 두려워하며 모든 창과 문을 닫아두고 현관문을 잠근 채 숨어 지내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시 제자의 사명을 받은 베드로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매우 광범위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철저하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동네를 옮겨가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한 것은 그의 스승 예수님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와 같이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이어 맡아 동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가 여러 마을들과 지역들을 방문하던 가운데 ‘룻다’라는 지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룻다에는 ‘애니아’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32-3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9: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행 9: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저는 오랜 시절 동안 이 ‘애니아’라는 사람이 여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남자 입니다. ‘애니아’란 이름은 ‘찬양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니아’란 이름을 우리나라식으로 이름을 바꾼다면 ‘김찬양’, ‘이찬송’ 이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다. 룻다에 도착한 베드로는 중풍병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애니아란 남 성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죠. 33절을 보니 그가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 학자들에 따르면 본문은 ‘중풍병에 걸린지 8년’이나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8세에 중풍병에 걸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든지 애니아는 오랜 세월 동안 중풍병에 걸려 고생해 왔던 것이죠.
중풍병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면 오늘날 식물인간의 모습과 같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중풍병자 혹시 기억나십니까? 지붕을 뚫고 들것을 내렸던 바로 그 사건 입니다. 중풍병자는 홀로 움직일 수 없어 그의 지인들이 그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것이죠.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 누가는 직업이 의사 입니다. 그는 환자의 상태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풍병 (Paralysis)는 온 몸이 마비 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사람 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니 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자기 몸을 못 움직이는 사람에게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애니아도 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많은 시간들을 울며 보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중풍병은 적어도 8년 이상 된 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누가가 애니아의 병이 8년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다시 말하면 이 병은 그 어떤 약으로도, 그 어떤 의사도 고치지 못한 병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럴 때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씀으로 각 종 병든 자를 고치시던 바로 그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미 주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이신 주님은 이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은 아주 놀라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애니아의 병을 고치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행 9: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는 오랜 세월 동안 중풍병으로 제 몸도 가누지 못했던 애니아를 보고 ‘예수님이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여전히 그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애니아의 병을 치유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으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성도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식물인간으로 8년간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가서 “김찬양씨, 어서 일어나서 침대정리 하십시오.”하고 말하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환자와 가족에게 너무나도 큰 민폐를 끼치는 것이고,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것입니다. 환자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는 일 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한 것이죠. 오랫동안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어야만 했던 애니아에게 베드로는 일어나 누웠던 자리를 치우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와 함께하심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었던 애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중풍병이 단 번에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것과 같이, 그의 제자 베드로 역시 말씀으로 병을 낫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베드로가 그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은 참 제자로 성장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주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 카메라를 돌려서 오늘 본문을 애니아의 입장에서 살펴봅시다. 8년간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사람의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소원은 남들 볼 때 큰 일은 아니었을 것이에요. 단지 자기 스스로 일어나 잠자리를 펴고 정리하는 것,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는 것…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었으나 애니아에게는 그 일상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는 중풍병 때문에 애니아 스스로도 병이 나을 것이란 기대를 갖지 못하고 포기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을 방문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의 모든 병을 낫게 했습니다. 애니아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성경에는 병이 치유된 애니아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8년간 제 몸 하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던 식물인간이나 다름 없던 이 사람이 나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 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은 절망스러운 우리 삶에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혹시 오늘 말씀을 듣는 분들 가운데 애니아와 같은 상황에 처한 분은 없으십니까? 꼭 중풍병이 걸려서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 힘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힘든 상황들과 인생의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분들은 없으십니까?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바로 이런 분들에게 예수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그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주님은 역사해 주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문제라 할지라도, 오래된 질병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일하시면 한 순간 나음 받고 해결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주님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 ‘주님이 일하시면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병자를 고치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35절을 한 번 봅시다. “(행 9: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그 어떤 의술이나 약으로도 고칠 수 없던 애니아의 중풍병이 낫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 마을을 다녀간 이후, 무려 100년 이상 이 도시 전체에 기독교가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그 일대의 영적 토양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중요한 부흥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애니아의 소문은 즉시 바람을 타고 인근 마을로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2. 죽은 자를 다시 살린 베드로

베드로는 룻다에 몇일 간 더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욥바에서 온 성도들이 급하게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함께 욥바로 가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사연을 알고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욥바에는 ‘다비다’란 이름을 가진 한 여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던 참 모범적이고 훌륭한 성도 였는데,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게 된 것입니다. 말씀 36-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욥바 사람들이 베드로를 모시고 욥바로 가려고 한 것일까요? 사랑하던 여제자 다비다가 죽었으니, 베드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장례를 집례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찾아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 장례 문화를 보면,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이 관례 였습니다. 오늘날처럼 시체를 보관하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혹 시체로부터 치명적인 전염병이 퍼지진 않을까 두려워 사람이 죽으면 당일 매장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룻다와 욥바의 거리는 약 18km 정도 됩니다. 이게 어느 정도 거리인가 보면 우리 교회에서 Lincolnshire에 위치한 스티븐슨 고등학교까지 거리 입니다. 하루에 걸어가기엔 너무 먼 거리 입니다. 욥바에서 사람들이 룻다까지 온 시간, 베드로를 모시고 룻다에서 욥바까지 갈 시간까지 계산해 보면 하루 이상 걸립니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장례 집례를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37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행 9: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람이 죽으면 옛날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염을 했습니다. 시체를 닦는 일을 한 거죠. 그리고 곧바로 매장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 다비다라는 여인이 죽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염은 했어요. 그러나 차마 땅에 묻지 못하고 시신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다락’에 두었습니다. 왜 이 시신을 다락에 두었을까요? 여기에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번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 입니다. 다른 하나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갈리는 사건 입니다. 이 두 사건은 각각의 별개의 사건이지만 흥미롭게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은 이의 시신을 다락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오늘 본문에 욥바 사람들이 다비다의 시신을 곧바로 매장하지 못하고 그를 다락에 두었다는 것은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여,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랬다는 것입니다. 이미 염까지 마쳤어요. 시신도 다 씻었어요. 그러나 차마 땅에 묻지를 못했어요. 사람들이 이 여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볼 수 있는 대목 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다는 베드로의 소문을 듣고 한 걸음에 룻다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과 함께 욥바로 향하게 됩니다. 이 때 베드로의 마음을 어떠했을까요? “아니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내가 간다고 뭐 별 수 있을까…”, “아니 이미 시신을 염까지 다 했다며? 근데 내가 가서 뭘 어떻게 하겠어?” 이런 의심의 마음을 가지고 갔을까요? 아니요.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두 차례나 목격한 사람 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을 때 베드로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즉 그는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하며 욥바로 향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수많은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었습니다. 39절 입니다. “(행 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모범적인 주님의 제자였어요. 다비다에게 도움을 받은 과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39절에 보면 “모든 과부가…” 베드로에게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남성 중심 사회의 구조상, 남편을 잃은 과부는 대부분 유대사회에서 가난한 취약계층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비다는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일일이 손수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아낌없이 베풀었던 다비다의 곁을 떠나지 못해 과부들은 다비다의 시신이 누워 있는 다락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를 보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그에게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간청 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을 다 방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40절 입니다. “(행 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이처럼 사람들을 밖으로 보낸 이유는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한참 동안 간절하게 기도 했을까요? 기도가 끝난 후, 베드로는 시체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대목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 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마가복음 5장 4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탈리다쿰” 입니다. 이것은 아람어의 음역을 소리 나는 그대로 성경에 실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베드로는 아람어로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다비다야 일어나라!” 바로 “타비다쿰” 입니다. 아람어 철자를 보면 딱 한글자만 빼고 똑같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를 회상하며 그의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40절 말씀을 보니 죽었던 다비다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녀가 확실하게 살아난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주신 것과 같이, 베드로도 다비다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베드로 역시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욥바의 성도들은 죽었다 다시 살아난 다비다를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크게 위로를 얻었습니다. 또한 그 소문이 욥바 도시에 퍼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두 가지 사건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여러모로 그의 스승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말투,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의 사역이 고스란히 베드로에게 보입니다. 지난날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모른다 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살았고, 제자로서의 사명을 버리고 갈릴리 바다로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결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닮아 갔듯 예수를 닮아 가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신앙생활하며 얼마든지 실패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이야기의 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실패하고 넘어진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기회를 붙잡고 다시 일어나 결국에는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가 닮아가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허물도 많고, 실수도 많은 우리들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와 온전한 제자가 되게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도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말투,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의 삶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제 2의 예수로 이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닮은 참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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