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3] (전체예배영상) 성경인물 시리즈 베드로 (1) “베드로, 예수님을 만나다” (마태복음 4장 18-20절)

한 사람의 인생은 ‘만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의 부모를 처음 만남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가정에서는 형제, 자매, 친지들을 만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선후배, 친구들을 만나며,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들을 만나게 됩니다. 더 자라면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후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시간이 더 지나면 그 자녀들이 낳은 손주들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은 이와 같이 만남의 연속 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 만남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 인생을 좋게 변화 시키고, 나쁜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 인생을 나쁘게 변화시킵니다. 우리 곁에 좋은 사람을 두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한 사람만 잘 만나도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좋은 만남은 좋은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좋은 형제, 자매들을 만나는 것,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40년 전인 1880년도에 미국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뇌척수염이란 질병으로 인해 지독한 열병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열병의 후유증으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엾은 어린 아기는 두 눈이 멀어버리고, 두 귀가 들리지 않아 시커먼 암흑 같고 침묵만 이어지는 고독한 내면의 세계에서, 이 세상과 단절된 채 외롭게 커갔습니다. 그 자신도 세상과 소통하기를 포기 했기에 그녀의 부모도 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집에 가정교사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외로운 아이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줍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갇혀 있는 내면의 세계를 뚫고 나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언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과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물’(water)란 단어를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펌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이 아이의 손을 갖다 대고, 다른 쪽 손바닥에는 ‘물’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쓴 것이죠. 한 두 번 만에 성공 했을까요? 아니요, 선생님의 가르치려는 의도를 알지 못했던 아이는 얼마나 많이 뿌리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수 없이 반복된 과정 끝에 어린 아이는 한 손에 느껴지는 물줄기의 촉감과 다른 손바닥 위에 쓰여지는 ‘물’(water)라는 단어의 연결 고리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세상과 소통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 순간부터 이 어린아이는 인생은 놀랍게 변화하게 됩니다. 생후 19개월 에 두 눈이 멀고, 두 가 멀어버린 이 아이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 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변화시켜 준 은인이 바로 앤 설리번 선생님 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1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훌륭한 이야기 입니다.

1. 변방 갈릴리에 찾아오신 예수님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님의 만남 같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준 위대한 만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그의 수제자 베드로의 만남 입니다.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생에 찾아오시는 장면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 말씀입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갈릴리 해변으로 찾아오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갈릴리 해변에서 사람을 선택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갈릴리 지역은 북방 경계선에 위치한 곳 입니다. 종교적 중심지를 생각하면 예루살렘 입니다. 경제적 중심지를 생각해도 예루살렘 입니다. 그 당시 학구적인 사람, 뛰어난 사람, 특출 난 사람을 찾으려면 예루살렘에 가서 찾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승천 이후, 지상에 남아 신약교회를 세우고 목숨을 바쳐 자신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할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주님은 이 북쪽 변방의 갈릴리로 찾아오신 것일까요?
한 번 이런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세계적인 대기업 총수가 자기 뒤를 이어 총수직을 물려 받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변 부하직원들이 총수에게 사람을 추천합니다. 이력서를 보니까 뛰어난 수재 입니다. 하버드 경영학과 박사 학위 소지. 국내 최연소 IVY 리그 MBA 학위 취득. 서류 안에 들어있는 사진도 보니까 키나 인물이나 집안, 사회적 경력과 이력… 부족한 점, 빼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에요. 한 마디로 S급 인물 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인재를 어디서 또 찾겠습니까? 그런데 총수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는 곧장 차를 타고 대한민국 남단의 조그마한 시골 어촌으로 향합니다. 총수는 우연히 남해에서 배에 타 그물을 내리고 있는 한 젊은 20대 청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 청년이 얼마나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하는지 몰라요. 총수는 그 날 부두에 내린 청년을 잠시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자네 나를 따라오게. 내가 자네를 내 후계자로 삼겠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 입니까? 아마 다음날 신문에 기사가 대서특필로 실릴 것입니다. 하루 종일 뉴스에 그 청년의 사진이 나오고, 장안의 화제가 될 것 입니다.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특별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마태복음 4장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일할 동역자이자, 그의 사역을 계승할 후계자를 찾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8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곳은 그 당시 종교적, 경제적, 학구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시골 깡촌인 갈릴리 지역, 그 중에서도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아래 얼굴이 검고 빨갛게 그을린 사람들이 사는 어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변두리에 산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임을 의미합니다.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신중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자신의 동역자요 복음 사역의 계승자를 찾는 이 중요한 일을 하시며 그 좋은 예루살렘을 뒤로 한 채, 변방의 갈릴리 해변 시골 깡촌에 찾아 오셨을까요? 주님은 중심지에서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변방이라 할 수 이는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무명의 노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그가 애굽이란 당대 화려한 문명의 중심지에 있을 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변방의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며 양을 치고 있을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궁에 살고 있는 사울왕은 버리시고, 시골 베들레헴에서 들 밖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동 소년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볼 때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던 무명한 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지역이나 나의 출생지 혹은 출신지가 하나님께 사용 받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 내가 배움의 기회가 적어 남보다 가방 끈이 짧다는 것도, 남들보다 소유한 재물이 적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제한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강하게 사용하시는 것을 즐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 목수라는 사실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무시 받고 천대 받는 나사렛 출신의 30대 젊은 목수 예수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 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을 들어 사용하셔서 부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약한 자들을 세우심으로 강한 자들을 치게 하십니다. 사무엘상에 기록된 한나의 고백을 함께 읽어봅시다. 사무엘상 2장 7-8절 말씀 입니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기도의 여인 한나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먼지 구덩이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궁핍한 사람들을 거름 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왕들과 함께 앉히시고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곳이 혹시 갈릴리가 아닙니까? ‘가난한 자’, ‘연약한 자’란 표현이 바로 우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와 같이 무명한 자, 연약한 자, 가난한 자들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니”라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실로 부족하고 연약한 인생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부자도 사용하세요. 학식이 많은 자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사도 바울을 한 번 보십시오. 그는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을 소지한 사람이었고, 당시 하버드 대학교 or 옥스퍼드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가말리엘 학파 출신 사람 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가장 뛰어난 3대 랍비 중 한 사람인 ‘힐렐’의 제자였어요. 바울이 기록한 신약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그가 구약성경에 얼마나 능통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뛰어난 사람 입니까? 그러나 그런 사도 바울은 지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아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삶의 고통이고 연약함 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향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후 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네게 충분히 은혜를 베풀었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은 네가 약한 데서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 입니다. 그러나 나의 부족함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핑계나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못했는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저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후에도 그렇습니다. 저는 말이 어눌하고 혀도 둔합니다.”라고 대답할 정도 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하게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의 동역자요, 복음 사역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시골 깡촌인 갈릴리 해변으로 찾아오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주님께만 보이는 그 무언가가 베드로 안에 있었기 때문 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베드로는 어촌에서 고기 잡는 어부에 불과 했지만, 주님의 눈에는 단 한 번의 설교로 3천명을 회심 시킬 수 있는 불과 같이 타오르는 사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 하실 때 우리의 가난,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무능함도 그 어느 것도 장애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연약함을 통해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말라 죽어버린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소년 다윗이 주은 조약돌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으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 두 개로 만들어진 십자가로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못할 인생은 없습니다. 시골 깡촌 갈릴리 어촌에서 고기 잡는 무명의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붙드시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불우한 형편이나 힘들고 가난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께 쓰임 받길 기대하며 거룩함으로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베드로를 유심히 관찰하신 예수님
갈릴리 해변에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와 안드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이들 말고도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배에 올라 그냥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관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어떠한 모습을 관찰하셨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8절 말씀 중간에 ‘보시니’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에이덴’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요 이 말은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주목하다’, ‘관찰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깨닫다’, ‘인삭하다’란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우연하게 마주친 베드로를 보고 그를 즉흥적으로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춧돌이 될 사도가 될 제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그 사람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계셨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습니까?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봅시다. “갈리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그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그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 역시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가 사무엘 선지자의 부름을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역시 고기를 잡는 일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것이죠. 또한 이후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일하는 현장에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고, 마태 역시 세리로 일하는 현장에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도 유심히 지켜 보십니다만, 우리가 일터에서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도 자세히 살펴보고 계십니다. 앞서 제가 ‘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을까?’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또 다른 이유 중 하나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선택하기 위해 그가 일하고 있는 일터, 현장으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1) 화목한 관계로 협동하는 베드로를 보심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동생 안드레 뿐만 아니라 세배대와 요한과 동업하는 모습도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한 성경학자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어떠한 마찰도 없이 야고보, 요한 형제와 화목하게 일하는 것을 보셨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만 하느라 주변 사람들은 잘 신경 쓰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변 사람을 수단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경우 일은 진행 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하나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 ‘일은 네모나게 하지만, 관계는 둥글게’ 하는 성숙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형제가 서로 협동을 잘 한다면,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일을 잘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두 형제들이 화목하게 일하는 것을 통해 그들이 장래 사역에도 화목하게 일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가정이나 일터 혹은 교회에서 서로 마음을 하나로 모아 협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맡은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 사회란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은 넘어지고 아파하고 있는데 혼자 열 걸음 앞장 서서 가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옆에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키고, 그들을 감싸주고 함께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이 더욱 탁월한 사람 입니다.

2) 맡은 일에 충실한 베드로를 보심
베드로와 안드레는 동업자들과 화목하게 협동하여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부로서 직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은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작은 일에 불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성실하게 되기 마련 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잠언 22장 2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잠 22: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근면 성실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게으른 사람, 불성실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교회는 거룩한 곳, 직장은 세속적인 곳으로 인식하며,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인식 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이 다 하나님께서 다르시는 세상 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곳이든, 우리가 일하는 직장도, 가게도, 일터도 모두 주님의 다스리시는 성스러운 곳 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는 갈릴리 바다, 즉 그의 일터, 일상의 현장을 영적인 장소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 인생에서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로 삶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하찮은 직업은 없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하찮은 인생이요, 직업일지 몰라도, 예수니은 그러한 관점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께 붙잡히면 그 사람의 인생은 다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는 고기 잡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베드로의 이와 같이 성실한 면모를 보셨습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직장에서 일하는 바로 그 현장을 하나님께서 유심히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는 주부들에게는 가정이 바로 일터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곳에 속해서 일하든지 주님은 우리의 관계성과 성실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또 다른 예배가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베드로를 관찰하고 계셨습니다. 이 주님의 심도 있는 관찰은 베드로를 향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좋지 않은 것을 찾아내서 그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해 그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관심은 따뜻한 관심이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기 위한 관심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지속적이고 따뜻한 관심이 결국에는 베드로의 인생을 놀랍게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오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여러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만남은 누구와의 만남이었습니까?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 중에는 지금 내 주변 혹 내 곁에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후회하고 계신 분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모를 원망하거나, 배우자를 속으로 미워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예민한 분들이 많아요. 그러한 때에 부부끼리 더 자주 한 공간에서 부딪히다 보니까 서로 싸우는 부부도 많습니다. 서로 예민해진 부모 자녀 간에도 충돌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면서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분들도 계신지 모르겠어요. 또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사람을 잘 못 믿어서, 친구를 잘 못 사귀어서 삶이 원치 않게 어려움에 처한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사실 죄인과 죄인과의 만남이라는 것에 어려움이 있고, 다툼이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여전히 최고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야마로 우리 삶의 모든 잘못된 만남을 뒤 엎을 수 있을만큼 강력한 만남 입니다. 맞아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부모를 잘 못 만날 것일 수도 있어요. 배우자를 잘못 선택한 것일 수도 있어요. 친구를 잘 못 믿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가장 놀라운 기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리 자신은 변화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이전에 잘못된 만남이라 생각했던 만남들 조차도 복된 만남으로 변화하는 것을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내가 변화하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변화하게 되는 거에요. 그로 말미암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복된 세상을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이야말로 진정 가장 복된 만남, 최고의 만남인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과 잘 만나고 계십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힘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 하나님과 깊게 만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십시오. 우리의 주님과의 만남으로 풍성하게 채워지는 귀한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