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5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마다 (출애굽기 20:18-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시기 위하여 시내 산에 강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강림하심과 함께 큰 우레 소리와 나팔소리가 들렸고, 번개가 내리치고 빽빽한 구름이 온 시내 산을 덮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은 진동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시내 산 기슭에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강림하심으로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압도된 채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전하여 주신 십계명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위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출 20: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출 20: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나님의 위엄이 얼마나 크신 지 이스라엘은 주님의 음성 듣는 것 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말씀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장면을 신명기 5장에서 더 자세히 봅시다. 신명기 5장 23-27절 말씀입니다. “(신 5: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신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신 5: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신 5: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신 5: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자 앞에 선 생쥐 한 마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자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에도 털이 삐쭉삐쭉 서 있을 터인데, 사자가 한 번 포효하면, 사자가 한 번 울부짖으면 그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할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청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써 제발 자신들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모세는 두려움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출애굽기 20장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출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0절에 사용된 ‘시험’이란 단어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을 향상시키고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두려움이 임할 정도로 크신 위엄 중에 강림하신 이유는 그들을 공포스럽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범죄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곧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를 향해 거룩한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인간이 죄악의 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만들어 줍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십계명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남은 율법의 모든 내용들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 말씀을 봅시다. “(출 20: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애굽기 말씀만 읽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기슭 경계선 앞에 서서 하염없이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내려 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5장 30-3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들은 이후 하나님께서 이들을 각기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5장 30-31절입니다. “(신 5: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신 5: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로 이를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출애굽기 20장 21절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성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빛이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암흑에 계실까?’하고 궁금해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여기서 한글 성경에 ‘암흑’이라 번역된 단어는 ‘빽빽한 구름’이란 단어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짙은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어 있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성전을 가득 채웠던 구름처럼 여호와의 거룩한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속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이유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거룩을 직접 볼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자비롭고 지혜로운 조처를 해 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 할 때 비로서 해석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 18편 9절입니다. “(시 18: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발 아래가 어둑캄캄하다”고 했는데, 이는 바꾸어 해석하면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실 때에, 그 발 아래에는 짙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영광과 위엄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짙은 구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후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습도 보기 두려워하여 모세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주님의 영광의 작은 조각도 이처럼 두려워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어찌 직접 바라보겠습니까? 출애굽기 20장 21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흑암’ 곧 ‘빽빽한 구름’에 들어간 이유를 아시겠죠? 이는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빽빽한 구름 속에 주의 임재를 두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절부터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지켜야 할 규례들이 담겨 있습니다. 빽빽한 구름 사이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주님의 모습을 이스라엘에게 직접 보이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들은 흑암 곧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은으로나 금으로나 우상으로 조각하여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된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23-24절 말씀을 하게 읽겠습니다. “(출 20: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4절 맨 처음 나온 단어인 ‘내게’는 히브리어로 “나를 위하여”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을 다시 해석하면 “나를 위하여 토단을 쌓아라”가 됩니다. 토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동하는 동안 쉽게 만들고 또 쉽게 부술 수 있는 흙으로 만든 제단입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화려함과 허식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면의 진실함과 거룩함을 더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이는 바로 앞에 있는 23절과 대조됩니다. 23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은이나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지 말라”말씀하시고, 24절에서는 “나를 위하여 흙으로 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기 좋고 사람 마음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금 신상, 은 신상 만들지 말고, 비록 금과 은에 비해 초라하고 소박해 보일지 몰라도 흙으로 쌓아 만든 토단에서 진실되게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하는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흙으로만 제단을 쌓은 것은 아닙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돌로 단을 쌓을 때는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20: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만일 정으로 돌을 쪼면 돌이 부정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기술을 동원하여 석재를 가공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제단을 가공하는 것이 가나안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길 때 사용하던 형식이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또 어떤 성경학자들은 돌은 다듬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리는 일이 아니라 부수적인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말씀은 제단이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임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말씀이나 신앙생활이 아니라 화려한 예배당, 최신식 교회 건물을 중요시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26절 말씀을 봅시다. “(출 20: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을 살펴보면 성기를 가리는 속옷을 별도로 입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야 남자들이 속옷도 입고 바지를 입습니다만, 모세 당시에는 남자들이 입는 옷이란 것이 원피스 치마처럼 통으로 된 겉 옷입니다. 따라서 속옷도 없죠, 옷은 펄럭이죠, 높은 층계를 오르내리다 보면 하체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하체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망령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의 경우에는 특별히 속옷을 만들어 입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8장 42절을 봅시다. “(출 28:42)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출 28: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42절에 나온 ‘고의’가 ‘속바지’ 혹은 ‘속옷’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이 고의를 입음으로 하체를 가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20장 26절 말씀은 하체가 보이지 않도록 제단에서 층계를 놓지 말라는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레위기를 보면 제단에서 내려온다는 진술들이 등장합니다(레9:22)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제단이 층계가 있는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로 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한참 뒤에 나타난 에스겔이 남긴 기록을 보면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만들 때는 층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43장 17절 말씀입니다. “(겔 43:17) 그 아랫층의 장이 십사 척이요 광이 십사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광이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을 향하게 할지니라”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시대가 흘러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입는 옷이 발전하였고, 그에 따라 속옷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크신 영광과 위엄의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분명 큰 특권입니다. 오늘 이 하루,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아름답게 높여드리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