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마음 단련 (잠언 17장 1-3절)

1. 부요함 보다 지혜를 찾으라.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어느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계시다고 가정해 봅시다. 매일 같이 새벽예배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중에도 교회에 나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주말에도 늘 교회에서 살다시피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넉넉합니다. 그런데 집사님 가정에는 큰 그림자가 드리어 있습니다. 집사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남편과 자주 싸웁니다. 자녀들과도 잦은 언쟁이 있습니다. 서로 간에 불평과 짜증이 섞인 대화가 오가고 집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과연 집사님은 행복할까요?
오늘 본문 1절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 제사는 자주 드리지만, 집 안에 불화가 가득한 가정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육선’이 가득하다는 것은 ‘고기 반찬’이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기 반찬이란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화목 제사를 드린 후 가족 혹은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는 고기가 바로 본문에 나온 ‘육선’입니다. 따라서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이란, 하나님 앞에 화목 제사를 드리고 화평의 떡을 나누어 먹지만, 정작 가정 안에서는 서로 다투고 싸우고 평안이 없는 집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값비싼 고기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가정은 부유한 가정 형편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마른 떡 한 조각’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빵을 의미합니다. 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하고, 극기 가난한 삶을 상징합니다.
1절 말씀을 오늘 우리 마음에 더 와 닿도록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 100불을 내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행복한 마음이 머무는 가정이, 십일조 만 불 내면선서 서로 미워해서 싸우고 다투는 가정보다 낫다.” 솔로몬 왕은 이처럼 풍유한 집안이라 할지라도 그 가정에 평안이 없고 다툼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가난한지만 가족 구성원이 서로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평안이 머무는 집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백만장자가 궁궐 같은 집에서 혼자 살다가 아무도 없는 방 침대에 서 고독사 하는 것보다, 차라리 초가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지내다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함께 둘러 서 있는 침대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화목한 가정은 그 자체로 천국과도 같습니다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은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많고 적음이 자신과 가정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돈이 가정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무조건 재물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행복과 사랑입니다. 부유해야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오히려 재물로 인하여 가정에 불화가 찾아오고 형제 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돈 문제로 이혼하기도 하고, 형제들이 부모의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서로 갈라서기도 하고 법정에 고소하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죽이는 사건, 보험금을 위해서 임신한 아내를 죽이거나 자녀들을 죽이는 비참한 일들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유용한 것이지만, 재물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로 행복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재물이 있을 때만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거짓이고 속임수입니다.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불행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콩 한쪽을 나눠 먹으면서도 서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재물을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만장자 로서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지만 끝내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집에서 살지만 너무 복을 많이 받아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고백하며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재물의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복에 만족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2. 높은 권세보다 지혜를 찾으라
1절 말씀이 인생의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짐에서 온다는 것을 이야기했다면, 2절 말씀은 인생의 행복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절에는 주인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가 주인의 아들로 살아가는 자보다 복된 삶을 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입니다. “(잠 17:2)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 고대사회에서 종은 집안의 노예로 가장 낮은 계층이며 신분입니다. 주인의 집에서 바닥을 쓸고 닦는 일, 논밭에 나가 노동을 하고, 무거운 짐 나르는 일 등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 주인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주인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이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주인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그는 슬기로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성실하고 유능했으며, 또한 성품이 깊어 덕도 있고, 매사에 사려가 깊었습니다. 그 결과 주인은 이 종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훗날 주인의 다른 아들들 중 한 사람과 같이 주인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주인이 종을 자신의 아들로 양자 삼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고전영화 [벤허]를 보면 로마 군대의 아리우스 제독이 노예였던 유대인 벤허를 자신의 양자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벤허의 손에는 아리우스 제독의 반지가 끼어지게 되고, 그는 아리우스 제독의 모든 유산의 상속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슬기로운 종은 비록 노예로 태어났거나 노예가 되었으나, 그 슬기로움을 통해서 주인의 골치거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그를 지하는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인의 양자가 되어 주인의 친 아들들과 함께 당당히 유산도 나눠 받게 됩니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수저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부자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금수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흙수저’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나 사회구조에서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가는 이미 그의 부모의 직업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수저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많은 출세의 기회를 갖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같은 세상적인 요소들에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이 달려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유함이나 사회적 신분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가르지 않고, 인생에는 오히려 더 결정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잠언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요소로써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쁘고, 보람되고, 후회 없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3. 고난 속에서도 지혜를 찾으라
사람이 자신의 발걸음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우리가 살고 싶은 인생이 있다고 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며, 인생이 우리가 계획한대로 다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선한 손이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능한 많은 부를 축적하고, 높은 신분으로 올라가는데 삶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부유하게 살아가는가, 얼마나 높은 신분으로 인생을 마감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안에 제거해야 하는 죄악은 없는지 점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을 직접 연단하십니다. 3절 말씀을 이어서 함께 읽겠습니다.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광부들이 광산에서 발견한 은광석과 금광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에서 광석을 녹여야 합니다. 이 때 금속을 녹이기 위해 만든 거푸집 곧 그릇이 ‘도가니’이며, ‘풀무’는 도가니 안에 들어가는 불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 바람을 넣는 도구를 가리킵니다. 도가니 안에 들어간 광석은 녹게 되고 그 가운데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도 높은 은과 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과정으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불순물 같은 죄악을 제거하고, 그에게 더욱 굳건한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그를 연단하십니다. 광석이 불에 들어가서 녹아야 순도가 높은 금속이 나오듯이, 하나님은 우리들을 불 같은 시험을 통해 우리들을 연단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왜요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 했길래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하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물론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로써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시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당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 보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그 어떤 부모가 자녀가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시련을 통해서 마음 속 불순물인 죄악이 제거되고, 더 순도 높은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해 사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던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119편 71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삶에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통해 우리 마음은 정결하게 변화됩니다.
혹시 오늘 말씀을 듣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계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만일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면, 이러한 시련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우리 마음의 교만함을 뿌리 뽑으려고 하시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독소를 제거하려고 하시는 것은 아닌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시는 것은 아닌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하고 선하신 섭리 아래서 우리를 위해 허락된 시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지혜가 바로 우리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예입니다. 비록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이라도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해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지내던 요셉은 성실하게 일했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자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디발 아내의 거짓 모함으로 인해 요셉은 죄수가 되어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특별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었을까요? 바로 요셉이 가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부인의 유혹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 벗어났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요셉에게 ‘꿈을 해몽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도 요셉은 해몽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 대답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은 남의 집 노예일 때이든지, 지하 감옥의 죄수일 때이든지, 애굽 왕 바로 앞에 서 있을 때이든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인생의 첫 사회 생활을 노예로 시작했으나 총리의 자리에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결말. 외적 조건보다 중요한 내면의 지혜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외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근원적으로 사람의 인생은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마음가짐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을 나눠 먹으면서도 화목한 가정이 있고, 넘치는 고기 반찬을 먹으면서도 서로 다투며 불화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에게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노예로 태어났으나 슬기롭게 행하여 주인의 유산을 상속받는 종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낙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추구하십시오. 지혜를 통하여 날마다 주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